친선녀 모란이 전하는 사랑의 전설

 2020.9.3.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는 고결한 인품과 덕망을 지니신 위대한 인간이시였다.》

인류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에게는 례외없이 그의 인간적미덕을 전하는 일화들이 전해지고있다. 하지만 우리 수령님처럼 생애의 전기간 고결한 인품과 숭고한 덕망으로 만민을 매혹시키며 사랑의 전설을 끝없이 펼쳐가신 위인은 없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후부터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만나주신 다른 나라 수반들을 비롯한 외국인사들은 무려 7만명이 넘는다. 피부의 색갈도 같지 않고 언어와 풍습도 다른 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수령님을 한번 만나뵙기만 하면 매혹되여 열렬히 흠모하고 높이 칭송하였다. 만민의 매혹과 흠모는 우리 수령님의 뛰여난 인품과 숭고한 덕망이 낳은것이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애의 전기간 정력적으로 벌리신 대외활동의 나날에는 수많은 나라 지도자들과 인민들에게 베푸시였던 사랑과 의리에 대한 전설이 수놓아져있다.

그 가운데에는 인도네시아의 한 평범한 녀성인 친선녀 모란이 받아안은 사랑의 전설도 새겨져있다.

친선녀 모란은 1960년대에 우리 수령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우리 나라주재 이전 인도네시아림시대리대사 유수프의 딸의 이름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4(1965)년 4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실 때 당시 우리 나라주재 인도네시아공화국 림시대리대사였던 수프리 유수프를 아시게 되였다.

유수프는 외교관례에 따라 대통령의 한 수행원으로 자기 나라를 국가방문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 사업에 참가하였던것이다. 그 과정에 그는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로숙하고 현명한 수령이시며 얼마나 인자하고 소박하고 겸손하신분이신가를 직접 체험하게 되였으며 그이의 위인적풍모에 완전히 매혹되게 되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분이신 우리 수령님께 평양에서 태여난 첫 딸의 이름을 조선식이름으로, 그것도 아주 뜻이 깊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지어주실것을 청드리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수프의 청을 쾌히 들어주시여 딸의 이름을 친선녀 모란이라고 지어주시면서 몸소 자신의 수표가 있는 친서까지 보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위인의 축복속에 아름다운 조선식이름을 가진 인도네시아의 어린이 친선녀 모란이 태여나게 되였다.

친선녀 모란이 전하는 사랑의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혁명의 길에 나서신 때로부터 한생을 동지들과 인민들속에서 보내신 우리 수령님과 깊은 인연, 남다른 인연을 맺고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때 잠시 사귀였던 이름없는 평범한 한 외국인과 그의 딸을 잊지 않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추억하군 하시였다.

모란과 그의 아버지를 잊지 않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2(1983)년 2월 11일 뜻밖에도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있는 인도네시아정부대표단의 한 성원으로부터 친선녀 모란이 올리는 편지와 사진을 받으시였다.

모란이 보내온 편지의 글줄들마다에는 자기에게 아름답고 뜻깊은 이름을 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흠모의 마음과 함께 자애로운 아버지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축원의 간절한 마음이 그리고 자기가 태여나고 어버이수령님 계시는 평양에 와보고싶은 절절한 소망이 담겨져있었다.

모란의 편지를 읽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게 된 17살의 녀학생 모란의 사진을 한동안 정깊게 보시다가 모란에게 자신의 회답편지와 선물을 보내주어야 하겠다고 그리고 그가 우리 나라에 휴양하러 오도록 초청하자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모란에게 보내줄 선물도 지정하여주시였으며 선물이 다 준비되였을 때에는 늦잡지 말고 빨리 보내주자고 하시면서 사랑의 친서도 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서에서 사진을 보니 모란이의 이름을 지어주던 일이 선하다고,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모란이가 벌써 대학에 갈 나이가 되여 자신에게 축원의 인사까지 보내게 되였으니 참으로 대견스럽다고, 모란이가 편지에서 자기가 태여난 곳인 평양에 오고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있다고 하였는데 자신께서도 역시 다 자란 모란이를 한번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쓰시면서 모란이가 건강한 몸으로 공부를 더 잘하여 앞으로 나라와 인민을 위한 훌륭한 인재가 되리라는 기대를 표시하시고 온 가족들에게 행복을 축원하는 자신의 인사를 전하여줄것을 부탁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로부터 사람들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식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을 드리군 하였다, 그것이 굳어져 이제는 하나의 세계적인 관습으로 되였다, 그러나 자신께서는 지금까지 이름지어준 아버지로서 모란에게 해준것이 없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편지를 보내주고 선물도 보내주게 되여 다소나마 마음이 놓인다고, 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부모되기는 쉬워도 부모구실하기는 쉽지 않고 이름을 지어주기는 쉬워도 이름지어준 아버지의 도리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인도네시아정부대표단이 돌아갈 때 편지와 선물을 꼭 가지고가도록 하라고 거듭 이르시고 해당한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모란에게 보내는 선물과 친서는 멀리 대륙과 대양을 날아넘어 인도네시아의 평범한 녀학생 모란 유수프에게 전해지게 되였다.

새겨보면 새겨볼수록 숭고한 사랑이 뜨겁게 넘쳐흐르는 위대한 수령님의 친서와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수표가 새겨진 선물은 인도네시아의 녀학생 모란으로 하여금 세상에는 친아버지, 친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뜨겁고 웅심깊은 위대한 사랑이 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모란은 이웃들이 동경하고 동무들이 부러워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2(1983)년 3월 3일 모란에게 이름을 지어주시던 때의 일을 다시금 회고하시면서 일군들에게 모란과 그의 어머니가 가을에 우리 나라에 오겠다면 동의를 주어야 하겠다고, 그들이 우리 나라에 오면 잘 대우해주어야겠다고 교시하시였다.

이토록 다심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속에 모란과 그의 어머니는 그해 가을 소원대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게 되였다.

그때로 말하면 공화국창건 35돐을 맞이하는것으로 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참으로 분망하신 때였다.

경축보고대회와 100만군중의 경축시위, 경축공연, 경축연회 등 성대한 행사들이 진행되였고 경축행사에 참가하러 온 세계 116개 나라의 270개 대표단들이 앞을 다투어 우리 수령님의 접견을 받고있었다.

그처럼 복잡하고 바쁘신 때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온 모란과 그의 어머니를 잊지 않으시고 그들이 경축행사들에 참가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으며 9.9절 당일날에만도 그들모녀에 대한 접견과 관련하여 두차례에 걸쳐 교시를 주시였다.

그 이튿날 또다시 일군을 부르시여 오후에는 친선녀 모란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시겠다고, 그들에게 직접 선물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선물로 수예품 《3선녀》와 사진액틀을 주되 모란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넣어주어야겠다고 말씀하시였으며 오후 첫 시간에는 또다시 모란모녀에 대한 접견에 시종 관심을 돌리시면서 응접실에 그들에게 줄 선물들과 김일성도 가져다놓으며 다과도 차려놓으라고 하나하나 일러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직급 높은 공식대표단도 아닌 모란과 그의 어머니는 9.9절당일행사가 끝난 이튿날 오후 금수산의사당(당시)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사랑넘친 선물도 받아안게 되였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까지 지니게 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기애애한 가정적분위기속에서 모란과 그의 어머니에게 모란의 이름을 지어주시던 일을 들려주시면서 친선녀는 두 나라사이의 친선을 의미하며 모란은 그 모양이 매우 아름다워 꽃가운데 왕으로 불리우는 모란꽃과 같이 곱다는 뜻이라고 친히 지어주신 사연깊은 이름의 뜻풀이까지 해주시였으며 앞으로 편지도 자주 하고 서로 친숙하게 지내자고 정겹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인도네시아에서 농업대학을 졸업한 다음 조선에 와서 실습하고싶다는 모란이의 허물없는 청도 흔연히 받아주시며 모란이 인도네시아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훌륭한 일군이 되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였다.

모란과 그의 어머니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화국창건 35돐을 맞으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기들을 만나주시고 따뜻한 말씀을 하여주시고 은정넘친 사랑의 선물도 안겨주신데 대하여 황송함을 금치 못해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건강을 삼가 축원하여 거듭 인사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고난 모란은 감격에 넘쳐 오늘이 앞으로 100년을 산다 해도 다시 없을 가장 기쁜 날이라고, 위대한 수령이신 자애로운 김일성주석님은 저의 영원한 친아버지이시라고 말하였다.

그때로부터 어언 7년세월이 흘러 모란이 가정을 이루게 되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결혼식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그의 나이와 결혼식날자까지 헤아려보시였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공예병풍 《모란봉》과 녀자옷감을 비롯한 여러가지 결혼선물을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아버지도 수륙만리 먼곳에 떨어져있으면 시집가는 딸자식에게 옷 한벌 못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5년전에 한번 맺으신 평범한 인연을 잊지 않으시고 진정 친아버지되신 심정으로 결혼선물까지 보내주신것이였다. 그것도 결혼식전에 선물이 가닿도록 하시려고 한달나마 앞당겨보내주시고 사연깊은 이름에 어울리게 모란꽃이 활짝 피여있는 공예병풍《모란봉》까지 특별히 마련해주시였으니 그것은 정녕 고결한 인품과 숭고한 덕망의 최고화신이신 우리 수령님께서만이 주실수 있고 펼치실수 있는 숭고한 사랑, 숭고한 인덕의 산 화폭이였다.

이처럼 친선녀 모란은 숭고한 덕망의 최고화신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친아버지로 모시고 그이의 따뜻한 사랑과 아낌없는 배려속에 이 세상 가장 행복한 딸이 되였다.

세상에 아름다운 인간적미덕의 일화를 남긴 위인들은 많지만 우리 수령님처럼 외국의 평범한 한 어린이의 친아버지가 되시여 그의 미래와 행복을 끝없이 축복해준 위인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기에 친선녀 모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더불어 전해지는 우리 수령님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느 위인도 지녀본적 없는 고결한 인품과 숭고한 덕망을 천품으로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를 보여주는 사랑의 전설로 세월의 끝까지 전해지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