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정변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해명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윤신영
 2026.2.1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봉건사회의 력사는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피어린 투쟁의 력사라고 볼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봉건국가에서는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그러한 대표적인 투쟁의 하나가 바로 묘청정변(묘청의 란)이였다.

묘청정변에 대하여 봉건사가들은 시종일관 왕정을 반대하는 반역사건으로 취급하였고 근대말기에 어떤 학자는 그 진보적측면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려는 현상도 나타났다. 해방후 우리 학자들속에서는 그것을 지배계급내부에서 벌어진 권력싸움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지배하였다.

이렇게 1960년대초까지 혼잡속에 뒤엉켜 똑똑한 해명을 보지 못하던 묘청정변에 대하여 력사상 처음으로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평가를 주신분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시기인 1962년 9월 27일 군사야영훈련의 휴식시간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묘청정변의 성격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묘청의 란은 1135년에 서경지방 량반들이 일으킨 정변으로서 고려시기 량반통치배들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의 하나였다고, 그러나 정변에 참가한 사람들의 지향과 요구에는 진보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정변이 개경량반들에 대한 서북지방 인민들의 반항과 결합되고 그것이 오래동안 지속되면서 진보적인 측면이 더욱 명백해졌다고 하시면서 묘청의 란은 서경량반과 개경량반들의 권력싸움이였지만 그것은 당시의 반사대세력과 사대세력사이의 대결이기도 하였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 가르치심에는 묘청정변의 성격을 평가하는데서 서경량반과 개경량반들사이에 벌어진 권력싸움이라는 부정적인 면과 함께 사대세력을 반대하는 반사대세력의 대결이라는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아야 하며 이 두 측면을 평균적으로가 아니라 진보적인 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 깃들어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시여 묘청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묘청정변의 성격을 명확히 립증해주시였다.

고려는 건국초기에 지난날 신라통치배들이 가지고있던 사대주의적인 외세의존정책을 배격하고 일련의 진보적인 시책을 실시하여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내외에 널리 시위하였다. 그러나 1126년 리자겸의 반란을 계기로 국력이 약화되자 개경의 반동적통치배들은 나라를 지켜나가는 가장 좋은 대책은 금나라를 섬기는것이라고 하면서 차츰 외세에 빌붙는 길로 나아갔다.

이를 반대하여 서경의 진보적인 량반들은 나라의 수도를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옮기고 임금을 황제라고 칭하며 자체의 년호를 만들어쓸데 대한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

결과 서경천도문제를 둘러싸고 사대세력과 반사대세력사이의 대립관계는 더욱 격화되였으며 나중에는 정변으로까지 번져지게 되였던것이다.

묘청정변은 개경에서 파견되여온 토벌군의 공격과 정변에 참가한 일부 서경량반들의 변절로 하여 진압당하였으나 그것이 1년이상 계속되였던것은 서경을 비롯한 서북지방인민들이 합세하여 용감하게 싸웠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렇듯 묘청정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하시여 묘청의 란은 서경량반들과 개경량반들사이의 권력싸움인 동시에 사대세력과 반사대세력사이의 심각한 대결이였다는 결론을 내리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묘청정변의 진보적성격을 뚜렷이 밝혀주심으로써 고려인민들속에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는 지향이 강렬하였음을 더 잘 알수 있게 되였으며 한편 지배계급내부의 정변이나 반란들가운데서도 진보적사건들을 찾아내여 옳게 평가서술할수 있는 새로운 지침이 마련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