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있어서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옳게 해명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옳게 해명하는것은 그 나라가 어느때부터 통일국가를 이루고 발전되여왔으며 그 나라 력사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써 첫 통일국가의 출현은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학계에서는 그토록 중대한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옳게 밝혀내지 못하고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는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있었다.
원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일찌기 7세기중엽에 저들의 사대주의적죄악을 가리워보려는 신라통치배들의 관념속에서 움터났고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의해 체계화되였으며 그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움직일수 없는 하나의 《정설》로 인정되여왔다. 이로부터 력사발전에 한생을 바쳐온 력사학자들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국주의사가들과 사대주의사가들이 써놓은 력사사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나라의 력사를 주체적립장에서 정확히 해명하여야 한다.》 (
7세기중엽에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진 다음 신라는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하였을뿐이고 그 이북의 광활한 령토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라는 나라가 새로 섰다.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200여년간 존재하면서 동방의 강국으로 이름떨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던 이 200여년간을 부당하게 《통일신라시기》로 명명하고 당시의 력사를 완전히 신라일면에서 다루고있었다.
그것은 발해력사를 묵살하는 결과를 빚어내였을뿐아니라 더 나아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이른바 《신라통일론》과 같은 외곡된 주장을 낳았다.
신라통치배들은 령토확장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고 기회를 노리고있던 당나라의 침략세력을 끌어들이는 죄악적행동을 감행하였다.
당시 신라통치배들의 대표자였던 김춘추는 당나라통치배들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데 대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는 당나라통치배들과 신라와 당나라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지역을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의 방대한 고구려땅은 당나라가 차지할것으로 흥정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에게 처음부터 삼국의 전령토와 주민을 하나로 통일할 의지도 없었고 또 삼국의 통일을 실현할만한 정치군사적힘도 없었다는것을 증시해준다.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삼국의 령토와 주민을 다 합치려하지 않았다.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신라와 한 《약속》을 줴버리고 고구려와 백제땅을 모두 독차지하려하였으며 신라마저 강점하려고 하였다. 당나라의 침략적야망이 로골화되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련합은 파괴되고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당시 삼국인민들이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곳곳에서 힘찬 투쟁을 벌린것만큼 신라통치배들이 삼국의 통일을 진심으로 원하였다면 삼국인민들의 투쟁을 옳게 이끌어 당나라침략자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있지 않았던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을 삼국의 전령토에서 몰아내려고 한것이 아니라 대동강이남지역에서만 몰아내고 그곳에서 저들의 통치를 유지강화하려고 하였다.
삼국의 통일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것을 실현할만한 힘도 가지고있지 못했던 신라에 의하여 삼국의 통일이 실현되였다고 말하는것은 어불성설이 아닐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