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해명을 위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가르쳐주시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박사 리광희
 2024.4.3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천리혜안의 예지와 과학적인 통찰력으로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를 빛나게 해결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부터 동명왕릉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때 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사람들은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다느니, 동명왕의 무덤이 집안에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력포구역 룡산리(당시의 중화군 무진리)의 동명왕릉으로 전해오던 무덤을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하였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동명왕릉으로 전해오던 무덤에 대한 재발굴이 진행되였는데 고구려의 시조왕릉이라는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래동안 이 무덤의 주인공문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오시다가 마침내 그 해명을 위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다른 고장으로 이사갈 때 다른것은 못가져가도 조상의 유골만은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시 매우 강대한 나라였는데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옮기면서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을리 없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론은 우선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를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풍속에 기초하여 해명하여야 한다는것이다.

풍속은 오래동안 형성되여 전해지는것만큼 옛날의 력사유적과 유물을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강대한 국력과 결부하여 연구를 진행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강대한 고구려는 자기식의 통치방식에 의하여 운영되였기때문에 그것은 당시의 력사해명에서 중요한 단서로 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방법론에 기초하여 동명왕릉문제를 해명할데 대한 영예로운 과업을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 주시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원, 학생들은 한결같이 떨쳐일어나 동명왕릉을 발굴하고 연구하는데 달라붙었다.

발굴과정에 무덤칸안에서 찾은 벽화와 금장식물들은 동명왕릉이 왕의 무덤이라는 확고한 증거로 되였다. 그리고 2기의 벽화무덤을 포함한 19기의 달린무덤(배총)들과 진주못, 정릉사터로 이루어진 릉원은 동명왕릉이 고구려의 일반 왕릉이 아니라 가장 높은 급의 왕릉이라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명왕릉의 축조시기는 무덤의 구조와 벽화상태로 볼 때 4세기말~5세기초에 해당되였다.

력사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왕위에 있은 고구려의 왕들가운데서 고국양왕과 그 아들인 광개토왕의 무덤은 당시의 수도였던 집안에 있었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98살까지 살다가 491년에 평양에서 죽었는데 장수왕의 무덤이 완성된 년대는 5세기말인 492~493년정도였다.

4세기말~5세기초에 평양에서 죽은 왕이 없으면 동명왕릉은 과연 누구의 무덤이겠는가.

이 문제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론-조선민족의 전통적인 풍습과 강대한 국력에 기초한 국가운영방식을 가지고 풀수 있었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고려의 력사책 《고려사》에는 13세기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과정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 시조왕과 부왕(왕의 아버지)의 무덤들을 가지고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옮겨온 사실이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고려시기 수도를 옮길 때 조상의 유골만은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에서도 평양천도시 시조 동명왕의 릉을 옮겨왔을수 있다는것을 시사하였다.

더우기 고구려는 동방의 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면서 시조왕에 대한 숭배를 중요한 통치사상으로 내세웠다. 광개토왕릉비문을 비롯한 고구려의 금석문들에는 시조왕의 건국업적이 맨 첫머리들에 두드러지게 강조되였고 큰 성들마다에는 시조왕의 사당들이 건설되여 국가나 성의 중대사와 관련된 행사들이 진행되였다.

고구려가 수도를 옮기면서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는것은 조상을 숭배하는 민족적풍습이나 국가통치방식의 견지에서 보나 응당한 일이였다.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무덤은 집안에 있는 태왕릉이며 그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와 고구려시기에 관과 껴묻거리를 옮겨가고 비여둔 무덤으로 볼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동명왕릉은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온것으로 보는것외에는 다른 견해를 세울수 없게 되였다. 이리하여 력포땅에 있는 동명왕릉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론에 의하여 고구려시조 고주몽의 무덤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고증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천리혜안의 예지와 통찰력으로 밝혀주신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은 오래동안 미궁속에 헤매이던 고고학자들에게 광명의 빛을 안겨준 력사적인 지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