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동명왕릉으로 전해오던 무덤에 대한 재발굴이 진행되였는데 고구려의 시조왕릉이라는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풍속은 오래동안 형성되여 전해지는것만큼 옛날의 력사유적과 유물을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강대한 국력과 결부하여 연구를 진행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강대한 고구려는 자기식의 통치방식에 의하여 운영되였기때문에 그것은 당시의 력사해명에서 중요한 단서로 될수 있었다.
발굴과정에 무덤칸안에서 찾은 벽화와 금장식물들은 동명왕릉이 왕의 무덤이라는 확고한 증거로 되였다. 그리고 2기의 벽화무덤을 포함한 19기의 달린무덤(배총)들과 진주못, 정릉사터로 이루어진 릉원은 동명왕릉이 고구려의 일반 왕릉이 아니라 가장 높은 급의 왕릉이라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명왕릉의 축조시기는 무덤의 구조와 벽화상태로 볼 때 4세기말~5세기초에 해당되였다.
력사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왕위에 있은 고구려의 왕들가운데서 고국양왕과 그 아들인 광개토왕의 무덤은 당시의 수도였던 집안에 있었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98살까지 살다가 491년에 평양에서 죽었는데 장수왕의 무덤이 완성된 년대는 5세기말인 492~493년정도였다.
4세기말~5세기초에 평양에서 죽은 왕이 없으면 동명왕릉은 과연 누구의 무덤이겠는가.
이 문제는 바로
고구려의 계승국인 고려의 력사책 《고려사》에는 13세기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과정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 시조왕과 부왕(왕의
이것은 고려시기 수도를 옮길 때 조상의 유골만은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에서도 평양천도시 시조 동명왕의 릉을 옮겨왔을수 있다는것을 시사하였다.
더우기 고구려는 동방의 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면서 시조왕에 대한 숭배를 중요한 통치사상으로 내세웠다. 광개토왕릉비문을 비롯한 고구려의 금석문들에는 시조왕의 건국업적이 맨 첫머리들에 두드러지게 강조되였고 큰 성들마다에는 시조왕의 사당들이 건설되여 국가나 성의 중대사와 관련된 행사들이 진행되였다.
고구려가 수도를 옮기면서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는것은 조상을 숭배하는 민족적풍습이나 국가통치방식의 견지에서 보나 응당한 일이였다.
장수왕의
그러므로 동명왕릉은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온것으로 보는것외에는 다른 견해를 세울수 없게 되였다. 이리하여 력포땅에 있는 동명왕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