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성산지구는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민족문화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훌륭히 발굴, 복구되여 인민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교양장소, 자랑높은 유원지로 꾸려졌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선조들이 어떤 문화를 창조하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어떠한 길을 걸어 발전하여왔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실물자료입니다.》 (
대성산주변에는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다음 160년간 수도를 정하고있던 시기에 리용된 대성산성과 안학궁터, 1 000여기의 고구려무덤들이 있었다.
대성산성은 당시 그 지대에 있던 고구려수도를 지키기 위한 방어성이였다.
대성산성을 발굴한데 의하면 성벽은 6개의 봉우리를 련결하여 쌓았는데 둘레의 길이는 7 076m이며 그안에 2개의 골짜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을 수용하는데 유리하였다.
성문은 모두 20개인데 제일 큰 남문을 발굴하였다. 그외에도 소문봉, 국사봉 등지에 작은 성문들을 조사하여 유사시에 성밖과의 련계를 보장할수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성안에서는 행궁터(림시궁전), 장대터(군사지휘터), 병영터, 창고터, 살림집터 등의 건축터들과 170여개에 달하는 못자리들도 발굴되였다. 대성산안에는 샘이 적은것으로 하여 물을 확보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물이 많이 고이거나 지하수가 있는 곳에 못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대성산성안에서는 많은 량의 기와와 성돌, 탄화된 알곡, 조각상, 금분으로 쓴 불경 등 진귀한 유물들이 발굴되였다.
궁성안에서는 남궁, 중궁, 북궁을 비롯한 궁전건물터들과 그것들을 련결하는 회랑터들도 찾아냈다. 궁전건물들가운데서 가장 큰 중궁의 중심건물은 앞면의 길이가 87m이고 옆면의 너비는 27m인데 이것은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큰 규모로서 고구려의 강대성을 잘 보여준다.
안학궁터에서는 암기와와 수기와, 괴면판, 치미와 같은 여러가지 기와들과 각종 질그릇쪼각들도 많이 발굴되였다.
안학궁터에서 나온 기와는 길이가 65~70cm되는것들도 있고 치미는 높이가 2.1m정도 되는데 이것은 건물의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괴면판은 건물을 《보호》한다고 하는 귀신을 형상한 조각품인데 안학궁건물들의 벽에 붙였던것이다.
조사결과 모두 25기의 무덤이 발굴되였는데 그가운데는 여러기의 벽화무덤들도 있었다.
방대한 량의 토량을 처리하고 많은 유물을 찾아내는 대성산지구에 대한 발굴은 한두해안으로는 끝내기 어려운 공사였다. 주체47(1958)년부터 시작한 대성산지구에 대한 발굴은 무려 10여년이나 걸렸으며 마침내 주체62(1973)년에 그것을 묶어서 도서 《대성산의 고구려유적》으로 출판하여
이 기간 력사학부의 수많은 학생들은 발굴뿐만 아니라 유적을 복구하는 공사에도 적극 참가하여 대성산지구를 애국주의교양장소로, 인민의 유원지로 훌륭히 꾸리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대성산의 력사유적을 발굴하고 복구함으로써 동방의 강국이였던 고구려의 력사에서 가장 강대하고 문화가 발전하였던 시기의 수도를 전면적으로 해명할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얻게 되였으며 력사유적을 단순히 발굴만 한데 그치지 않고 복구하고 공원으로 꾸려 많은 인민들이 찾아와 휴식을 하면서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애국심을 키워나갈수 있게 되였다.
이러한 성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