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김승일
2018.9.28.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교육사업, 민족간부육성사업을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관련되는 국사중의 국사로 내세우시고 해방후 그처럼 어렵고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종합대학부터 세워주시였습니다.》
룡남산마루에 거연히 솟아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으로, 강성조선의 려명을 부르는 주체교육과학의 최고전당으로 그 이름을 높이 떨치고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어제와 오늘에는 대학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종합적인 민족교육의 원종장으로, 나라의 미래를 떠메고나가는 굴지의 민족간부양성기지로 강화발전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의 발자취가 뜨겁게 아로새겨져있다.
해방후 모든것이 어렵고 복잡했던 속에서 해야 할 일, 바로잡아야 할 일이 많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담보되여야 할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민주조선의 수도 평양에 우리 나라의 종합적인 민족간부양성기지, 진정한 인민의 첫 대학을 일떠세우실 웅대한 구상을 펼치시고 그 실현을 위하여 크나큰 로고와 심혈을 바치시였다.
주체36(1947)년 4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당 건설부문의 일군들을 부르시여 종합대학 새 교사건설안을 작성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현대적인 교사와 교육시설이 없이는 대학사업을 잘해나갈수 없고 교육의 질도 높일수 없다, 우리는 이번에 농민들이 땅을 받은 기쁨을 안고 국가에 바친 애국미로 종합대학교사를 짓기로 하였다, 농민들이 바친 애국미를 나라의 만년대계를 위한 후대교육사업에 쓰는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에서 갓 해방된 당시의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종합대학 새 교사와 같은 큰 규모의 건설공사를 벌려놓는다는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나마도 당시 건설부문 일군들은 아직은 나라사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건설력량도 충실하지 못한 조건에서 큰 건설을 많이 벌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이 창건되고 인민정권이 수립되였으니 당중앙위원회청사와 정부청사 같은것을 먼저 건설하게 되리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있었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과업을 주신 종합대학 새 교사를 비롯하여 규모가 큰 건설대상들은 전부 후대들을 위한 교육기관과 인민의 복리증진과 잇닿아있는 편의시설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미래, 인민의 행복과 잇닿아있는 이 건설대상들을 현대적인 건물로서 2~3년안에 훌륭히 일떠세울것을 구상하시면서 그 실현을 위하여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렇듯 숭고한 뜻에 떠받들려 재령군의 김제원농민이 봉화를 들고 그 모범을 따라 600만농민들이 한결같이 떨쳐나 나라에 바친 지성어린 애국미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가장 값있게 쓰이게 되였으며 온 나라의 기쁨속에 김일성종합대학 새 교사를 비롯한 시대의 기념비적건축물들이 웅장하게 솟아오르게 되였다.
나라에서 새 조국을 위하여 처음으로 일떠세우는 큰 건물이 다름아닌 후대교육시설이고 인민자신의 복리를 위한 사랑의 시설들임을 알게 된 인민들은 감격을 금치 못해하며 성심성의로 건설을 도와나섰으며 김일성종합대학 건설장에는 날마다 1 000여명의 평양시민들이 달려와 물심량면의 뜨거운 지성을 다하였다.
건설이 진행되는 전과정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대교육과 나라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보호사업을 위하여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지금 김일성종합대학 본관이 자리잡고있는 터전에 깃들어있는 뜻깊은 사연도 조국의 력사를 깊이 연구하고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아끼고 보호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그날의 높으신 뜻을 전해주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들중의 하나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사기간 종합대학건설장을 10여차례나 찾아주시며 불멸의 로고를 바치시였다.
이른새벽에도 나오시고 깊은 밤에도 나오시였으며 무더운 여름날에도 바람사나운 겨울날에도 나오시여 걸린 문제들을 풀어주시고 좋은 방도들을 찾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로고는 이루 헤아릴수 없이 컸다.
종합대학 새 교사건설이 결정된지 얼마되지 않은 주체36(1947)년 4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학 공학부(당시)에서 만든 새교사모형사판을 보시고 우리가 앞으로 짓는 대학은 건물도 중요하지만 위치가 더 중요하다. 대학의 위치는 공기도 맑고 경치도 아름다운 대동강기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좋다고 하시면서 대학주변은 교원들과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알맞게 꾸려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새 교사건설이 일정에 오른 때부터 그 위치에 대하여 생각해오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해 8월 10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친히 모란봉에 오르시여 청암리쪽을 돌아보시고 그 둔덕에 위치를 잡아주시였다.
그런데 얼마후 뜻밖에도 그곳에서 고구려때의 토성자리가 발견되였다.
주체36(1947)년 9월 8일 관록있는 력사학자인 박시형선생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학자들을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문가에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자리를 잡기를 기다리고계시다가 한가지 토론할 문제가 있어 불렀다고 하시며 종합대학이 들어앉을 자리가 옛날 토성자리라는게 사실인가고 물으시였다. 그 자리가 고구려토성자리로 알려져있다는 그들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대학을 그 자리에 짓게 되면 토성이 얼마나 허물어지게 되는가, 력사적으로 꼭 보존해야 할 토성인가를 일일이 알아보시였다.
이에 박시형선생이 일제놈들의 파괴략탈정책으로 인하여 많이 마사지고 또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여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되였지만 고구려토성으로서 남아있는것이 얼마되지 않는 조건에서 될수만 있으며 보존하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올리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선생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보존하자고, 앞으로 우리 나라 력사를 더 잘 연구하며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시키자면 력사유적들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하나의 평범한 력사유적을 놓고도 조국력사연구의 전반을 헤아려보시며 친히 학자들을 부르시여 그들의 소박한 의견까지도 귀중히 들어주시는 수령님의 위대한 풍모에 박시형선생을 비롯한 학자들은 깊이 머리를 숙이였다.
청암리쪽에 잡아주셨던 종합대학의 첫 터전에도 역시 위대한 수령님의 그렇듯 세심한 사랑과 로고가 어리여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력사를 귀중히 여기고 새로 건설하는 종합대학에서 어떠한 교육관과 숭고한 조국관으로 나라의 기둥감들을 교양육성해야 하는가 하는 깊은 뜻을 영원토록 새겨주시기 위하여 대학의 터전을 옮기실것을 결심하시고 또다시 위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새기시였다.
그후 대학터전을 다시 잡아주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 현지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유적은 그대로 보존하여야 한다고, 교사위치를 다른 곳에 옮기자고 하시면서 9월 8일 또다시 숲속을 헤치시며 미암산으로 가시였다.
그러나 그곳은 새 교사를 앉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룡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시였으며 마침내 거기에 대학을 앉히도록 자리를 정해주시였다.
오늘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있는 룡남산의 명당자리에는 이런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으며 나라와 민족의 천만년미래와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한없이 소중히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과 세세년년 이어가며 민족의 귀중한 재부를 아끼고 잘 보관하여야 한다고 우리 인민들에게 하시는 수령님의 간곡한 당부가 뜨겁게 어리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