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에 새겨진 충신과 간신, 역적들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것은 력사를 대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그가운데는 한편의 애국적인 시작품과 그것이 남긴 력사적교훈에 대하여 들려주신
이날 점심식사후 학생들은 흥겨운 오락회를 하였는데 한 학생이 나서서 시 한수를 읊었다.
그런데 그가 읊은 시는 봉건시대의 한자시였다. 오락회가 끝난 다음 학생들은 사회주의현실에 맞지도 않는 시를 읊은데 대하여 못마땅해하면서 《봉건》이 심하다고 그를 놀려댔다.
시를 읊은 학생은 이 시는 봉건시대에 창작된것이지만 애국심이 잘 표현된 시라고 하면서 동무들의 핀잔에 반발해나섰다.
한편의 시를 놓고 싱갱이질을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시던
뜻밖의 물으심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학생들에게 웃음어린 눈길로 바라보시던
《남이는 녀진침입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에서 용맹을 떨치고 26살에 병조판서를 한 젊은이였습니다. 남이의 애국충정과 남아다운 기상은 그가 지은 시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백두산의 돌은 칼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러주랴, 이 시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남이(1441-1468)는 조선봉건왕조초의 용감한 장수로서 풍채가 름름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성격과 행동이 기백있고 과단성이 있었다.
17살때 무사를 뽑는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무관이 된 남이는 녀진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라의 북부국경지대를 안정시키는데서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26살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벌써 온 나라의 군사를 지휘통솔하는 병조판서가 되였다.
남이는 젊었지만 나라를 위한 충정심과 남아다운 기상을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남이의 시 《북으로 출정하며》는 남이
남이가 싸움마다 군공을 세우고 승진을 거듭하는것을 제일 질투한것은 류자광이였다. 류자광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이를 누르고 벼락출세를 할 생각으로 그를 중상할 기회만을 엿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유난히 밝은 빛을 뿌리고있었다. 혜성을 본 사람들은 나라에 무슨 불길한 일이나 생기지 않겠는가 하여 근심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남이는 그것은 옛것이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좋은 징조일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엿들은 류자광은 남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보태여 그가 반역을 기도하고있다는 죄를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하면》이라는 시구절까지 문제가 되여 남이는 끝내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하였다. 류자광은 그후에도 남이를 모해하던 그런 수법으로 사림파에 대한 살륙전을 일으켰다.
무관인 남이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재능과 명성, 지위가 저보다 월등하고 인망이 높아진것이 시기심이 많은 류자광을 참을수 없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런데다가 새로 왕이 된 예종은 원래 시짓기를 즐겨하는 성미여서 매일같이 문사들을 거느리고 풍월에만 빠져있으면서 남이의 용맹하고 강직한 성격을 은근히 싫어하고있었다. 이것을 눈치챈 류자광은 예종과 남이사이에 쐐기를 박아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남이가 임금의 누이와 방탕한 관계를 가지고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러가지로 획책하며 기회를 노리던 류자광은 남이가 28살이 되던 해에 드디여 그를 반역죄로 몰아 사형장에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어느날 밤 혜성이 나타났을 때 남이가 한말을 류자광은 제멋대로 해석하여 반역을 기도하고있다는 죄를 만들어냈으며 나중에는 남이가 지은 시 《북으로 출정하며》에서 《남아이십 미평국(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하면)》이라는 시구를 《남아이십 미득국(사나이 스무살에 나라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의 《반역행위》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를 꾸며놓았다.
류자광은 이렇게 남이의 시에서 나라의 안녕을 지키려는 애국심을 나라를 얻겠다는 반역음모로 외곡하였던것이다.
결국 남이는 류자광의 검질긴 모함에 의하여 나라를 위한 그 장한 뜻을 다 펴지 못하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애국적인 시 《북으로 출정하며》와 남이의 희생이 주는 교훈을 놓고 간신과 역적을 경계할데 대하여 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