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학자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박사 남일룡
 2021.5.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로동당시대는 과학자, 교육자들앞에 과학탐구의 넓은 앞길을 열어주고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10권 130페지)

평범한 교육자, 과학자의 한사람이였던 채희국선생이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민족사를 빛내이는 길에 그처럼 뚜렷한 흔적을 남길수 있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사연구에 온갖 정력을 깡그리 쏟아부을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보살피심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일찌기 력사학탐구에 대한 푸른 꿈을 안고 방황하던 곡절많은 수난자, 이것이 식민지지식인이였던 채희국선생의 해방전 운명이였다. 나라가 해방되였지만 그 어디에 가서도 력사연구의 꿈은 실현될수 없었다.

그러나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따사로운 손길아래 공화국의 품에 안긴 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의 높은 교단에 서게 되였으며 그때로부터 인생의 희망이였던 력사연구의 나래를 펼칠수 있게 되였다.

채희국선생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은 정녕 새삶의 은인이시였고 위대한 스승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력사학자에 불과했던 채희국선생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고 일제식민지통치와 외세의 강점하에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짓밟혀오던 그의 소박한 꿈이 꽃펴나도록 하나하나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력사학자인 그는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였으며 민족사연구와 후대교육사업에 온갖 정열을 바쳐올수 있었다.

주체47(1958)년 4월 채희국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에게 대성산은 자랑스럽고 오랜 력사를 가진 곳이므로 유적들을 모두 발굴하여 선조들의 애국주의정신을 인민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력사유적을 복구하는 사업은 반드시 복구에 필요한 과학적자료들을 충분히 조사연구한데 기초하여 당성, 로동계급성의 원칙과 력사주의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은 채희국선생은 대성산성, 안학궁과 그 주변의 고구려무덤떼 등 유적발굴에 자신의 지식과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고구려유적의 면모와 성격을 과학적으로 밝힘으로써 대성산일대를 애국주의교양장소로, 근로자들의 훌륭한 문화휴식터로 꾸릴수 있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채희국선생을 비롯한 학자들이 《조선통사》서술에서 고조선의 유적유물발굴문제로 하여 전진을 가져오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아시고서는 3년동안 고조선의 유적유물자료를 마련할수 있도록 어느 한 나라에 직접 가서 발굴사업을 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걸음걸음 가르쳐주시고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손길에 이끌려 채희국선생은 어느덧 고고학 및 민속학분야의 당당한 권위자로 자라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3(1974)년 1월 23일 동명왕릉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나라를 창건한 시조왕의 묘지를 옮겨온것으로 보는것이 정확하다고 하시면서 우리 민족의 매우 귀중한 유적인 동명왕릉발굴과 연구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채희국선생은 낮에 밤을 이어 전투를 벌려 마침내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의 정당성을 힘있게 론증하고 원상대로 복원할수 있는 튼튼한 기초자료들을 마련할수 있었다.

언젠가는 선생의 등을 정겹게 두드려주시며 선생이나 나나 더 늙기 전에 민족의 문화유적들을 다 찾아 빛내이자는 가슴뜨거운 말씀도 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주체80(1991)년 5월 1일 동명왕릉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고고학 및 민속학강좌장을 비롯한 교원들과 학생들이 동명왕릉과 관련한 귀중한 력사자료들을 발굴하였기때문에 동명왕릉을 이처럼 훌륭하게 꾸릴수 있었다는 분에 넘치는 감사의 교시를 주시고 며칠후에는 그들에게 높은 표창을 줄데 대한 은정깊은 사랑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은 진정 선생의 성장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이시였다.

하기에 채희국선생은 그 사랑, 그 믿음에 충성으로 보답하기 위하여 언제나 가슴불태웠으며 후대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에 온갖 정열을 다 기울이였다.

그는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동명왕릉과 그 주변의 고구려유적》, 《고구려시조 동명성왕》, 《고구려력사연구》를 비롯한 여러종의 단행본들과 20여종의 고고학 및 민속학분야의 새 과목들을 개척하고 교과서로 출판하여 후대교육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채희국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한 관심과 보살피심속에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최상의 영광과 행복을 누려온 남다른 행운을 받아안은 학자였다고 말할수 있다.

주체78(1989)년 4월 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채희국선생을 부르시여 동명왕릉을 함께 돌아보시면서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이야기과정에 어딘가 모르게 그의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다는것을 헤아려보시였다.

이날 현지지도를 끝내고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선생이 이발이 다 빠져 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시며 그에게 이발을 잘해줄데 대하여 간곡히 교시하시였고 며칠후에는 선생에게 이발을 잘해주도록 거듭 당부하시면서 그가 이발만 해넣으면 정정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의 신상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변화도 놓치지 않고 정정한 몸으로 반만년의 민족사를 빛내이는 사업에 내세우시려 그토록 마음쓰시는것이였다.

그해 6월 중순 어느 한 력사유적앞에서 또다시 선생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이발을 해넣은 정형을 알아보시고 이발을 해넣고 제낀 옷을 입으니 한결 젊어보인다고 하시며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채희국선생과 같은 력사학자들은 매우 귀중한 로학자들이라고, 그들과 같은 권위있는 력사학자들이 없으면 우리 나라의 력사를 제대로 찾아낼수 없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주체79(1990)년 선생이 불치의 병으로 앓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유능한 의료진으로 대수술을 조직해주시고 최신형의료기구도 구해오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주체81(1992)년 4월 15일 채희국선생은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는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탄생 80돐을 맞으시는 뜻깊은 그날 금수산의사당(당시)으로 채희국선생을 부르시였던것이다.

만면에 해빛과도 같은 환한 미소를 담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좌중을 둘러보며 더없이 기쁘신 어조로 우리의 로박사라고 소개하시였다.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였던 외국의 수반들과 당과 정부의 일군들의 눈길이 삽시에 채희국선생에게로 쏠리였다.

순간 선생은 우리의 로박사라고 불러주신 이 칭호보다 더 값높은 표창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며 친부모의 심정으로 자신을 영광의 절정에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그날의 감격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인 그해 5월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성시를 현지지도하시면서 다시금 채희국선생을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선생과 함께 왕건왕릉, 고려성균관, 선죽교, 만월대, 박연폭포 등 유적들을 돌아보시며 이야기를 나누시였으며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정녕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더욱 뜨거워만지는것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채희국선생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믿음이였으니 그품에 운명도 미래도 모두 맡긴 학자의 행복과 영광은 세월과 더불어 끝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따사로운 손길아래 꽃피워온 채희국선생의 값높은 삶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품속에서 더욱 빛을 뿌릴수 있게 되였다.

채희국선생의 사업과 생활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몸소 그에게 안겨주실 사랑의 선물을 마련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을 잃은 아픔이 큰 채희국선생의 심정을 헤아리시여 위대한 수령님존함이 새겨진 금시계를 선물하도록 하시였던것이다.

한생을 금과 같이 변함없기를 바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극진한 당부가 깃든 사연깊은 금시계를 받아안은 선생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존해계실 때 주실수 있는 모든것을 다 베풀어주시였지만 로학자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해주고싶으시여 마음을 쓰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시기 헤여져 생사도 모르는 딸의 행처를 찾아 부녀간에 감격적인 상봉을 마련해주시였다.

새겨볼수록 분에 넘치고 그 깊이를 알수 없는 위대한 사랑, 그 사랑이 지금껏 자기를 지켜주고 보살펴주고 내세워주고있다는 생각에 선생은 격정으로 가슴들먹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5(1996)년 3월 15일 채희국선생이 78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을 때에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자신의 명함으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고 그의 장례를 잘 치르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해 8월 일군들에게 채희국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과 연고가 깊은 로학자였다고 다시금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세월을 이어 끊임없이 돌려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이토록 숭고한 믿음과 지극한 사랑속에 지금도 채희국선생은 조국과 인민앞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렬사들과 나란히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다.

진정 우리 수령, 우리 당이 위대하고 그 품이 한없이 따사로워 이 땅의 이름없는 학자도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었고 유구한 반만년의 우리 민족사와 찬란한 전통도 그토록 빛을 뿌릴수 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