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력사적인 사건과 사실을 통하여 경험과 교훈을 잘 찾아야 합니다. 력사에는 교훈적인 사건이 적지 않습니다.》
1961년 4월 25일
학생들의 토론을 주의깊게 들어주시던
계속하시여
사실 고구려가 힘이 약하여 신라와 주변나라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볼수 없다. 고구려의 국력이 마지막시기까지도 강하였다는것은 640년대로부터 660년대 전반기에 걸쳐 이웃나라의 거듭되는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그때마다 성과적으로 물리친 사실만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당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이름난 애국명장이였고 나라의 실권자였다. 연개소문은 사대주의적경향에로 기울어지던 투항분자들을 단호히 제거하고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였으며 외적의 거듭되는 외교적 및 군사적위협과 무력침공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연개소문때문에 강대한 나라로 더욱 소문이 났다.
우리 나라에서 국력이 강한 나라로 소문났던 고구려가 갑자기 무너진것은 668년이였다.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다음 맏아들 연남생이
고구려내부에서의 권력싸움은 지방순찰을 나간 연남생이 어떤 자로부터 지금 수도에서 당신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있다는 무근거한 소리를 들은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처음 남생은 음모군들이 아무리 리간을 시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음모군들이 너무나도 리간질을 하는 바람에 주대가 약한 남생이 넘어갔다. 그리하여 남생은 동생들인 남건과 남산이 정말 자기를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 첩자를 평양에 들여보냈다. 남생이 파견한 첩자를 잡은 남건은 정말 형이 자기들을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음모군들의 말을 확신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즉시에 왕명을 꾸며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남생대로 자기가 첩자를 보낸 일이 있으니 수도에 들어가면 죽을것 같아 두려워하던 나머지 국내성으로 달아났다가 결국에는 적국인 이웃나라로 넘어갔다.
이렇게 남생은 이웃나라의 완전한 주구로 전락되였다.
남생이 거란과 말갈병들 그리고 자기가 거느리는 무력을 끌고 이웃나라에 투항하였기때문에 고구려는 내부가 크게 혼란되였고 군력도 사분오렬되였었다.
나라의 군사적실권을 잡고있던자들속에서 권력싸움이 일어나고 나라의 중요한 비밀을 거의다 쥐고있던 대막리지 연남생이 적지 않은 군대까지 끌고 적에게 투항하게 됨으로써 국가통수체계와 방위체계는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생은 적들이 주는 벼슬까지 받아가지고 침략자의 길잡이가 되여 평양으로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국경방어진과 요새시설, 평양에로 향하는 모든 길목들을 환히 꿰뚫고있는 남생은 적들을 끌고 어렵지 않게 평양으로 쳐들어와 고구려의 보장왕을 생포하였다.
아무리 적들의 수백만대군이 쳐들어와도 끄떡없던 강대한 나라 고구려였으나 충신의 가문에서 난 역적때문에 하루아침에 망하고말았다.
사실 연남생이 음모군들의 간계에 걸려들어 권력싸움에 말려든것도 그렇지만 자기 한몸을 생각하면서 나라를 배반하고 외적의 앞잡이로 굴러떨어진것은 더욱 한심한 일이였다. 연남생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였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수도로 돌아가 음모군들의 정체를 밝혔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의의 길이 아니라 반역의 길을 택했으며 결국은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것이였다.
해박한 식견으로 력사자료를 들어가며 분석하신
나라의 통수체계와 방위체계의 마비, 국내의 분렬과 권력싸움, 력사는 피의 교훈으로 이것을 가르쳐주고있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