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는 우리 민족의 력사를 주체적립장에서 과학적으로 정립하여주신 위대한 스승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박사 지일신
 2019.12.18.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일찌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시기 조선사람은 인류발생의 려명기에 이 땅에서 생겨나 사회발전의 력사적단계들을 순차적으로 거치면서 자기 력사를 독자적으로 개척하고 발전시켜온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우선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해주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문제를 정확히 밝히는것은 단순히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사람의 기원문제, 우리 나라 력사의 시점과 관련되여있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구석기시대가 원시사회의 가장 이른 단계로서 구석기시대의 존재여부에 따라 이 땅에서 인류가 기원되였는가 아니면 다른데서 이주하여왔는가 하는것이 규정되기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일부 고고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그때까지 구석기시대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하면서 다른 지역에서 구석기시대를 거친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에 우리 나라 땅으로 이주해온듯이 주장하고있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조선민족은 결국 다른 나라 사람의 후손이라는것으로 되는데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실태를 깊이 헤아리시고 주체50(1961)년 5월 24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하신 담화 《력사유적과 유물을 적극 발굴하고 잘 보존관리하자》를 비롯한 여러 로작들에서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명을 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것은 단순한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구성 특히 우리 민족의 기원문제와 직접 잇닿아있는 매우 심중한 문제입니다.》 (김정일전집》 제3권 123페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옛날 우리 선조들의 거주지역과 가까운 주변나라들에서 이미 구석기시대유적이 적지 않게 발굴된 조건에서 우리 나라 땅에만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볼수 없으며 먼 옛날 우리 나라 자연기후조건을 놓고보아도 구석기시대에 우리 나라 땅에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는 할수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을것이며 그때부터 사람이 살아왔을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시였다.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있었을것이라는 위대한 장군님의 결론은 주체52(1963)년에 우리 나라에서 첫 구석기시대유적이 발견되고 그후 련이어 구석기시대유적이 발굴되게 됨으로써 과학적으로 확증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천리혜안의 빛나는 예지와 과학적통찰력으로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존재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을 주심으로써 조선사람의 기원문제, 우리 나라 력사의 시점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새롭게 풀어나갈수 있는 길이 뚜렷이 열리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또한 우리 나라에서 노예소유자국가의 형성문제와 중세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과학적으로 해명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지난날 제국주의어용사가들과 대국주의사가들은 우리 나라 고대 및 중세초기력사를 란폭하게 외곡날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의 노예소유자국가의 형성문제와 중세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를 옳게 해명하는것은 제국주의어용사가들의 반동적궤변을 짓부시고 우리 민족력사의 유구성과 독자성, 합법칙성을 정확히 밝히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제기되였다.

그러나 당시 학계에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노예소유자국가형성문제에 대하여 똑똑한 견해와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있었으며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에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채 갑론을박하고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고대국가들이였던 고조선, 부여, 진국을 원시종족집단이라고 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노예소유자국가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이웃나라의 영향을 받아 원시사회에서 노예소유자사회를 거치지 않고 형성된 봉건국가라고 주장하고있었다. 사실상 이러한 주장은 지난날 제국주의어용사가들과 대국주의사가들이 내놓은 주장과 별로 다름이 없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노예소유자국가형성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서는 삼국이전시기의 력사를 잘 푸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고조선, 부여, 진국의 사회경제적형편을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조선, 부여, 진국에는 세습적인 왕과 발전된 관료통치기구, 법과 상비무력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고조선의 《범금8조》, 부여의 순장제, 진국의 포로노예와 관련된 자료들을 분석종합해보면 고조선, 부여, 진국이 노예소유자국가였다고 볼수 있는 근거가 명백해진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분석자료에 기초하여 고조선, 부여, 진국을 수천년전에 원시사회가 무너지면서 형성된 우리 나라의 첫 계급국가, 노예소유자국가로 보는것은 력사자료에도 맞는다고 하시면서 이런 각도에서 우리 나라의 고대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깨우쳐주시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노예소유자국가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이 이루어지게 되였으며 제국주의어용사가들과 대국주의사가들, 사대주의사가들의 반동적리론을 철저히 폭로분쇄할수 있는 새로운 지침이 마련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을 바로 풀기 위한 방향과 방도에 대하여서도 명확한 해명을 주시였다.

당시 력사학계는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해명에서도 사대주의, 교조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여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을 해명하려 하면서 삼국이 봉건사회를 이를만큼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하였다는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삼국을 노예소유자사회라고 주장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외부의 충격적영향으로 삼국의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여 삼국이 원시사회로부터 봉건사회로 비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본질에 있어서 우리 나라 력사를 외곡하는 외부의 어용사가들의 주장과 차이가 없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그릇된 주장을 배격하시고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해명에서 주체적립장을 견지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려면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을 그 이전시기에 존재한 고조선, 부여, 진국과 그 이후시기에 봉건국가로 존재한 고려, 조선봉건왕조와 대비분석하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고조선, 부여, 진국이 노예소유자국가이며 삼국시기의 계급관계가 고려, 조선봉건왕조와 별로 큰 차이가 없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삼국이 봉건사회였다는것이 명백해진다고 깨우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삼국시기 사회경제적성격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명확히 밝혀주심으로써 생산력발전수준, 기술발전수준을 해당 사회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를 푸는 기준으로 보던 기성리론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였으며 우리 민족의 력사와 그 발전의 합법칙성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력사교육이 사람들속에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키워주는 참다운 민족력사로 정립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