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남산과 더불어 잊지 못해하신 교육자의 한사람 현호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김경철
 2015.9.8.

주체과학교육의 최고전당 김일성종합대학의 연혁사를 돌이켜보느라면 위대한 스승의 손길아래 한생을 교단에 서서 값높은 삶과 영예를 빛내인 교육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중에는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나날에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속에 참된 교육자로 성장하고 장군님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였던 경제학부의 현호범선생도 있다.

주체87(1998)년 9월 19일 신미리에 자리잡은 애국렬사릉을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날이 저물도록 오랜 시간 렬사들의 생전의 모습이 돌사진으로 새겨진 묘비들을 일일이 돌아보시고나서 여기에 와야 할 사람들이 더러 빠졌다고 하시며 문득 현호범선생의 이름을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현호범선생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충실히 일하다가 병으로 사망한 우리 당이 기억하는 충신이였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현호범선생은 당장 애국렬사릉에 안치하여야 합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시기의 사적자료발굴사업을 비롯하여 당의 기초축성단계때에 기여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우리곁을 떠난지 어언 20년이 되여오고 수십년간 교정에서 함께 일하였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해져가고있었건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시고 그렇게도 잊지 못해하시며 이렇듯 영생의 언덕에까지 세워주시려는 현호범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주체14(1925)년 9월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에서 출생한 현호범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주체46(1957)년부터 주체67(1978)년까지 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원, 학부장으로 사업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마음속에 현호범선생이 그처럼 깊이 자리잡게 된것은 그가 장군님께 정치경제학강의를 해드리는 행운을 받아안은 그때부터였다. 숭고한 도덕의리를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바로 그날부터 위대한 혁명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그를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는 전기간 그에게 주체교육의 참뜻을 깨우쳐주시고 주체의 정치경제학의 심원한 원리와 방법론을 심어주시며 그가 주체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도록 이끌어주시였을뿐아니라 사업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침마다 그를 만나시면 밤새 건강하였는가고 례절있게 안부도 물어주시고 그의 강의를 받으시고는 많은것을 배웠다고 경의도 표시하시였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강의에 들어온 그의 얼굴에 비낀 짙은 병색을 헤아려보시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지방에 가셨다가 몸소 진귀한 보약재를 마련하시여 그의 집에 보내주시였고 그후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의료진의 검진치료를 정상적으로 받도록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또 한번은 그가 늘 수수한 닫긴깃옷을 입고 교단에 서는것을 보시고 모직 제낀깃양복과 넥타이까지 마련하시여 그의 집에 보내주시였다.

현호범선생에게 베푸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3(1964)년 3월 30일 김일성종합대학 제17기 졸업식에서 졸업증과 최우등표창장을 받으신후 몇명의 교육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실 때에도 그를 그 자리에 내세워주시였다. 그후 온 나라의 크고작은 일들을 보살피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그를 잊지 않으시고 자주 전화를 거시여 그를 비롯한 교원들의 안부를 물어주시고 때로는 당중앙위원회에 부르시여 사업과 생활도 료해하군 하시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세워주시였다.

언제인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손목시계를 일군들에게 표창하는 사업이 진행될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선생은 오늘까지 당과 조국을 위하여 묵묵히 일해온 교원이라고, 그러니 응당 앞순서에 놓아야 한다고 하시며 그의 이름을 앞순서에 놓도록 하시였다. 또한 언제인가는 어느 한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과학토론회에 참가할 대표단명단을 보아주시다가 그가 없는것을 아시고 해당 일군들에게 전화를 거시여 그를 보내야 한다고, 그가 이번 기회에 다른 나라 형편을 알게 하고 세계의 광범한 학자들과 접촉시켜 안목도 넓히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를 대표단 단장으로 보내도록 하시였으며 돌아온 후에는 그들이 거둔 성과를 두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당은 동무들이 이번 국제과학토론회에 가서 훌륭한 성과를 이룩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고, 앞으로 일을 더 잘하길 바란다고 믿음도 주시였으며 당창건 30돐행사를 비롯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광의 자리에 불러주시고 높은 급의 국가표창과 함께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도 안겨주시였다. 이렇게 그를 늘 마음속에 안고계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기에 언제인가 그가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과오를 범했을 때에는 그를 보증해주시였다.

진정 현호범선생에게 있어서 위대한 장군님은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며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하기에 그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견결한 교원혁명가로서 우리 당의 교육정책관철을 위하여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쳤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기 위한 사업과 혁명사적관, 선물진렬실, 백송리혁명사적지를 꾸리는 사업이 제기될 때마다 비록 학자이지만 남먼저 팔을 걷고 나서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쳤으며 특히 대학에 깃든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활동사적을 발굴정리하는 사업에 적극 참가함으로써 우리 당의 기초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말 경제학부에 처음으로 《김일성동지의 경제학로작》과목을 새로 내올것을 발기하고 교과서집필로부터 교수요강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강의준비와 교무행정체계를 세운 다음 자신이 그 첫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현대제국주의의 특징》을 비롯하여 많은 교과서, 참고서들을 집필하여 과학교육사업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수많은 석사, 박사를 키워냈다.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에 충정으로 보답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가던 현호범선생은 주체67(1978)년 6월 불치의 병으로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가슴아파하시며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할데 대하여서와 그에게 높은 급의 국가표창을 수여하고 그의 가족들에게는 사회주의애국희생증을 수여할데 대하여 그리고 군대에 나간 맏아들을 소환하여 대학에 보내며 졸업후에는 아버지가 섰던 초소에 세울데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후 여러차례 일군들에게 그는 학계와 리론계의 중진으로 활동한 교육자이고 학자일뿐아니라 당의 기초축성단계때에 크게 기여한 일군이였다고 뜻깊게 회고하시면서 그의 가족들의 행복상을 TV와 방송으로 널리 소개하도록 하시였고 그의 부인이 생일 70돐을 맞이하게 된다는것을 아시고는 현대적인 살림집과 사랑의 생일상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참으로 한생을 지켜주고 보살펴주시고도 생후의 넋도 보증해주시며 빛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영원한 삶의 품속에서 현호범선생은 애국렬사들과 나란히 영생의 언덕우에서 가장 값높은 삶을 빛내이게 되였다.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이렇듯 위대한 스승, 자애로운 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으로 하여 현호범선생만이 아닌 룡남산의 수많은 교육자들은 오늘도 교육과학전선의 전초병으로서의 영예로운 사명을 다해가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선군혁명령도를 높은 교육과학실적으로 받들어나가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