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과 그 후과에 대한 명철한 가르치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강명석
 2024.2.13.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국력의 단합은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가져오지만 분렬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지난날의 력사가 보여준 하나의 심각한 교훈입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시기인 주체51(1962)년 9월 15일 김일성종합대학 군사야영생들과 하신 담화 《리조시기 당쟁의 후과에 대하여》에서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벌어진 당쟁의 특징과 그 후과에 대한 명철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선 군사야영생들에게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당쟁이 벌어지게 된 동기와 그 특징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쟁이 벌어지기 이전시기에 통치배들속에서 진행된 권력싸움은 오랜 문벌출신의 량반들과 왕실귀족들을 한편으로 하고 새로 정계에 등장한 신흥량반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벌어졌는데 이것을 력사에서 사화라고 한다고 하시면서 4차례의 사화에서는 권력을 쥐고있던 오랜 문벌량반들이 신흥량반세력을 탄압하는것으로 결말을 보았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570년대 중엽부터 통치배들속에서 벌어진 권력싸움은 다른 양상을 띠고 진행되였다고 하시면서 그 직접적동기로 된것은 조선봉건왕조 전랑자리를 놓고 김효원과 심의겸사이의 의견대립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것처럼 당시 조선봉건왕조 전랑은 벼슬등급은 낮았지만 관리임명에서 권한이 대단히 높았던것으로 하여 그 자리를 한번 차지하면 전랑자리는 계속 같은 문벌과 학벌, 출신 등의 량반들이 차지할수 있었다. 그런것으로 하여 한성안의 량반관료들은 이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심의겸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였다. 당시 김효원의 집은 한성 동쪽에 있었으므로 그 일파를 동인이라고 하였으며 심의겸의 집은 한성 서쪽에 있었으므로 그 일파를 서인이라고 하였다.

동인은 인차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또 로론과 소론으로 분렬되였는데 력사에서 이것을 사색당파라고 하였다.

이러한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6세기중엽이후부터 벌어진 당쟁은 권력을 쥐고있던 량반통치배들속에서 아무런 정견이나 주의주장에서 벌어진 싸움이 아니라 순전히 누가 권력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리겠는가 하는것을 놓고 벌어진 세력다툼이였다고, 이러한 싸움은 근 30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음으로 군사야영생들에게 당쟁의 후과와 교훈에 대해서도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쟁의 후과는 우선 나라의 방위력을 약화시키고 국력을 분렬시켜 외래침략자들로부터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커다란 난관을 조성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앞에 어려운 일들이 제기되고 대내외정세가 복잡하면 할수록 나라의 모든 힘을 굳게 단합시켜야 하지만 당쟁을 벌리는 봉건통치배들속에서는 자기의 야심과 당파적리익만을 생각하면서 다른 당파에 속한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모해함으로써 국력을 분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대표적인 실례가 임진조국전쟁전야에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데서 잘 나타났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당시 조선봉건왕조가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 목적은 대일관계의 긴장성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침략기도와 그 준비상태를 확인하자는데 있었다. 그렇지만 귀국후에 서인파에 속한 황윤길은 일본침략자들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쳐들어올것이라고 하였으며 동인파에 속한 김성일은 전란이 터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태평성세만 부르짖으면서 전쟁이라면 겁부터 먹던 통치배들은 거짓말을 하는 김성일을 두둔하고 황윤길에게는 오히려 민심을 소란시킨다는 추궁까지 하였으며 결과 봉건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방비상태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은 봉건통치배들속에서 자기 당파의 리익을 위해서는 나라의 운명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나라에 정치적혼란을 조성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도탄속에 몰아넣었다는데 당쟁의 후과가 있다고 하시면서 《인조반정》과 《리괄의 반란》을 놓고보아도 당쟁이 나라의 정치적혼란에 얼마나 커다란 후과를 남겼는가를 잘 알수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623년에 서인파들이 광해군과 대북파들을 몰아내고 새로 인조왕을 왕으로 올려앉히는 이른바 《인조반정》이라는 왕권전복행위가 있었는데 이것은 명분이 어떻든간에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속에서 빚어진 왕권교체로서 그 어떤 정치적견해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권을 장악하기 위한 서인파의 권력싸움이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고나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로부터 얼마후에는 《리괄의 반란》이 일어나고 또 이 사건을 리용하여 후금침략자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오게 되였는데 그것은 당쟁으로부터 초래된 후과이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당쟁의 후과로 하여 나라의 발전은 심히 억제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당시 17세기이후에 유럽에서 근대적인 문명이 급속히 발전하는데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에 몰두하고있던 봉건통치배들은 쓸데없는 공리공담으로 세력다툼만 벌리고있었는데 그 대표적인것이 1659년에 례론을 둘러싼 권력싸움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당쟁으로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거나 사회활동에서 배제되였으며 남다른 견해나 특이한 발명을 하는것까지도 다른 당파의 공격을 받을수 있는 구실로 되였고 결국은 사회가 발전할수 없게 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군사야영생들에게 국력의 단합은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가져오지만 분렬은 파멸을 가져온다고, 이것은 지난날의 당쟁의 력사가 보여준 하나의 심각한 교훈이라고 힘주어 가르쳐주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장군님께서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시기에 하나의 력사적사실을 통하여 당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고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강화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군사야영생들에게 깊이 깨우쳐주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