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문제는 우리 나라가 어느때부터 통일국가를 이루고 발전되여왔으며 우리 나라 력사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있어서나 첫 통일국가의 출현은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며 따라서 그것을 옳게 해명하는것은 민족사발전의 합법칙성을 뚜렷이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된다. 그러나 196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력사학계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과 같은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옳게 밝혀내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7세기 중엽에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7세기 중엽경에 저들의 사대매국적죄악을 가리워보려던 신라통치배들속에서 움터났고 1145년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의해 체계화되였으며 그후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움직일수 없는 하나의 《정설》로 인정되여왔다.
그러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부당성은 우선 고구려, 백제가 무너진 다음 우리 나라 판도우에는 발해와 신라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였다는것이다.
사실 7세기 중엽에 신라봉건통치배들은 외세와 야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하였을뿐이였고 그 이북의 광대한 령토에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200여년간 존재하면서 《해동성국》으로 이름떨친 당당한 우리 민족의 주권국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있던 령토에 두개의 서로 다른 주권국가인 발해와 신라가 병존하고있은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지 않았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력사학계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던 이 200여년간을 《통일신라》시기라고 하면서 당시의 력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취급하고있었으며 동족의 나라인 발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돌리지 않고있었다. 그것은 지난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발해를 마치도 고구려를 계승한 고구려유민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로 잘못 인식하고있었으며 또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인정한 일부 학자들의 경우에도 신라중심주의적사고방식으로 하여 발해의 력사적지위에 대한 옳은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있었던것과 관련되였다.
우리 나라 령토우에 하나의 통일적인 주권국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개의 주권국가가 함께 있었다는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정체를 명확히 발가놓을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마련한 지도적지침이였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부당성은 또한 신라통치배들자체가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있지 않았으며 또 그것을 실현할만한 힘도 없었다는것이다.
당시 신라통치배들에게는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침공하여 령토를 넓히려는 야망만 있었을뿐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은 전혀 없었다.
648년에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통치배들과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지역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의 넓은 고구려땅은 당나라에 떼여넘긴다는 내용의 용납못할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에게 삼국의 전령토와 주민을 하나로 통합할 의향이 처음부터 없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더우기 신라통치배들은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전체 민족과 령토가 당나라의 강점밑에 들어갈수 있는 위험이 조성된 엄혹한 시기에도 거족적인 투쟁에 일떠선 세나라인민들과 힘을 합쳐 끝까지 싸운것이 아니라 대동강이남지역만을 차지하고는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가는 죄악을 저질렀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실현할 힘도 없었다.
삼국을 통일하자면 그것을 실현할만한 국력이 있어야 하며 직접적으로는 강대한 군사력이 안받침되여야 한다.
당시 신라의 상비무력은 고구려의 3분의 1정도밖에 안되였는데 이러한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는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수 없었다.
우리 나라 삼국시기로 말하면 민족의 통일지향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통일국가형성문제가 중요한 력사적과제로 일정에 올랐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요구를 반영하여 고구려는 오래전부터 삼국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주변나라들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합하여 힘있게 밀고나갔다.
고구려는 4세기 70년대이후 특히 427년 평양천도후 삼국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5세기말‐6세기 초엽에 남쪽으로 아산만‐금강‐소백산줄기‐청하(후에는 삼척)계선을 차지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령토는 서북쪽은 내몽골동부 대흥안령산줄기가까이까지, 북쪽은 흑룡강남쪽류역, 동북쪽은 흑룡강하류류역에까지 미치고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당시 우리 민족이 살고있던 전체 령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나라로 등장하였다.
제반 사실은 6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시켜온 삼국통일위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만약 그 무렵에 외세와 야합한 신라봉건통치배들의 배족적인 행위가 없었더라면 고구려는 삼국을 통합하고 우리 나라를 통일된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을것이다.
바로 이러한 력사적사실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고구려멸망후 우리 나라 력사상에 있은 발해와 신라는 서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채 병존하였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많은 부분을 수복하기는 하였으나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을 뚜렷이 계승하지는 못하였다.
우리 나라 력사에 나타났던 이러한 제한성은 10세기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극복되였다.
고려는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하여 후백제, 후기신라와 함께 그 이북의 옛 고구려땅을 다 통합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울것을 중요한 통일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리였다.
고려태조 왕건은 동명왕의 옛땅을 우리 나라의 오랜 강토로 생각하면서 신라뿐아니라 옛 고구려땅을 다 차지하려고 하였으며 993년 반거란전쟁시기 거란과의 담판장에서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그래서 나라이름도 고려라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계승한 고려는 성립직후부터 서북방진출을 강화하면서 934년에 발해의 왕세자 대광현을 받아들인것을 비롯하여 발해멸망후 동족의 나라로 찾아들어오는 수십만명의 발해유민들을 포섭하였다. 한편 남쪽의 크고작은 지방할거세력들과 후기신라, 후백제에 대한 통합을 다그쳐 935년에는 후기신라를 귀순시키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로 등장하였다.
력사적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계에서는 의연히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사로잡혀 고려를 후기신라의 북쪽땅에서 일어난 신라의 《후신국》으로만 간주하면서 고려에 의한 《재통일》론을 인정하고있었다.
고려《재통일》론은 신라에 의하여 통일되였던 이른바 《통일신라》가 그 말기에 다시 태봉(고려)국과 후백제, 신라 등 《후삼국》으로 갈라지게 되였는데 고려가 바로 이 《후삼국》을 통합하여 재통일을 이룩하였다고 하는 주장이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을 전제로 한 이러한 고려《재통일》론의 정체를 처음으로 헤아려보시고 바로잡아주신분은 바로
비범한 예지와 과학적통찰력을 지니신
이처럼
참으로 력사상 처음으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부당성을 해명해주시고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새롭게 밝혀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