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적관계도 자기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발생발전하였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제국주의어용사가들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일부 아시아나라들이 자체로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을 걷지 못하고 다른 자본주의나라들의 영향에 의하여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고 주장하고있었다. 특히 일제의 어용사가들은 일본의 《개화자적사명》을 운운하면서 조선에서의 근대문명은 일본이 조선을 개항한 이후 일본의 영향밑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저들의 침략과 략탈을 합리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의 자본주의적관계 발생발전문제는 우리 나라 력사를 바로잡는데서, 력사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을 밝히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봉건시기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가지 훌륭한 수공업제품과 문화용품을 생산하였으며 그것을 다른 나라들에 많이 수출하여 나라의 발전된 경제와 문화를 세상에 널리 시위하였다. 《고려》라는 우리 나라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것도 당시에 상품생산과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그것이 다른 나라들에 널리 알려졌기때문이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자본가와 임금로동자의 출현은 상품화페관계의 발전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조선봉건왕조후반기에 상품생산이 장성하였고 그에 토대하여 상품류통, 화페류통이 전례없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금속화페가 전국적범위에서 중단없이 류통된 사실은 그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당시 누구보다도 많은 량의 화페재산을 그러모은것은 봉건량반지주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상업에 돈을 투자하는것이 아니라 토지를 사들여 봉건적착취를 강화하는데 돌리였다. 그것은 지주의 대부분이 량반신분이였으므로 사회적으로 천시하던 상업에 돈을 투자하지 않았으며 또한 토지는 당시 가장 《안전한》 생산수단, 착취수단이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중에 있던 돈은 고리대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산업에 흘러들어가게 되였다.
17세기중엽이후 상품화페관계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상인들의 진출도 강화되였다. 특히 개성, 평양, 의주를 비롯한 도시들에서는 많은 화페자본을 그러모은 대상인들이 자라나게 되였다.
대상인들은 신분적으로는 량인이였으므로 수공업공장주나 광산주가 되는것을 꺼리지 않았고 그로부터 자기의 돈을 광산에 투자하여 더 많은 리득을 얻을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였다.
다른 한편 신분적예속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더욱 강화되고 상품화페관계가 급속히 장성하면서 봉건적인 신분예속관계에 점차 금이 가고 류랑민, 품팔이군대렬이 늘어나게 되였다.
노비신분출신의 인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질겁한 봉건정부는 노비세전법의 수정, 신포법의 개정, 공노비《방량》이라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분적으로는 량인으로 되였지만 아무러한 생산수단도 가지지 못한 하나의 계층이 형성되게 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의 자본주의관계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손길이 뻗치기 훨씬 이전부터 발생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살하고 파괴략탈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서 민족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수공업마저 파괴함으로써 민족경제의 전반적발전을 억제하였다.
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