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해방후 출판물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않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여

 2023.5.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의 혈전만리 피바다를 헤치시며 조국해방의 민족사적위업을 이룩하심으로써 일제에게 빼앗겼던 조국과 함께 완전히 잃을번하였던 조선말과 글도 찾아주시였다. 조국이 해방됨으로써 조선인민은 나라의 주인, 자기 말과 글의 참다운 주인이 되여 자유롭고 행복한 새 생활을 창조할수 있게 되였다.

해방직후 조선인민의 절대다수가 조선글을 읽을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조선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출판물들에 한자를 많이 섞어썼기때문에 제대로 읽을수 없었다.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출판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출판물에서 어떤 글자를 쓰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므로 해방후 조선인민의 글말생활에서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자를 쓰도록 하는것은 중요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방후 조선인민의 언어생활에서 제기되는 절박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신데 기초하시여 출판물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자를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보다먼저 출판물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를 쓰는것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의 출판물은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을 위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당의 출판물은 한자를 섞지 말고 인민들이 알아볼수 있는 국문활자로 인쇄하여야 합니다.》 (김일성전집》 증보판 제4권 234페지)

조선인민은 자기의 훌륭한 민족글자를 가지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통치배들은 조선의 민족글자를 천시하고 한자를 기본서사수단으로 리용하였다. 더구나 일제강점시기에는 조선의 말과 글이 일제의 탄압대상으로 되였다. 이로부터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조선인민의 언어생활에서는 한자가 많이 사용되고있었다.

언어생활에서 한자가 많이 사용되면 광범한 대중이 조선글로 된 출판물을 제대로 읽을수 없게 된다.

하여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도록 하는것은 언어생활에서 미룰수 없는 중요한 요구로 제기되였다.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도록 하는것은 우선 언어생활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요구이다.

출판물에서 한자사용을 허용하는것은 외래적인 요소를 허용하는것으로서 이것은 언어생활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리기 위한 근본요구에 배치되는것이다.

또한 언어생활에서 2중적인 부담을 덜고 자주적이며 능률적인 글자생활을 하려는 조선인민의 절실한 념원과 지향을 풀어주기 위한 절박한 요구이다.

출판물에서 조선글자와 함께 한자를 섞어쓰면 조선글자만 알고서는 글을 제대로 읽을수 없었다.

또한 조선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을 높이기 위한 절박한 요구이다.

당시 조선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을 높이는데서 가장 큰 장애는 한자사용문제였다. 한자의 사용은 한자어의 사용을 의미하며 앞으로 새로운 한자어의 증대를 동반하게 된다. 이로부터 출판물에서 한자사용을 페지하고 조선말과 글을 널리 보급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조선말과 글의 민족적특성을 높이 발양시키면서 사회적기능도 원만히 수행할수 있게 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으로 해방후 출판물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자만을 쓰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리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광범한 근로대중을 새 조국건설에로 조직동원해야 할 사명을 지닌 당보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말며 신문들과 학교의 교과서들을 비롯한 출판물들에서도 점차적으로 한자를 쓰지 않도록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4(1945)년 11월 5일~6일 당중앙조직위원회 기관지 《정로》 책임주필과 하신 담화에서 당출판물들을 모두 국문활자로 인쇄할데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출판물을 만드는데서 글을 인민대중이 알기 쉽게 통속적으로 쓰는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나 읽어볼수 있게 조선글로 인쇄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신문사나 출판사들을 현지지도하실 때만이 아니라 나라의 여러곳을 현지지도하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로동자, 농민들이 제기하는 소박한 의견도 정책적문제로 보시고 신문에서 한자를 쓰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또한 주체35(1946)년 1월 11일 《자유황해》 신문주필을 만나시여 신문의 편집방향과 계급적성격 그리고 신문기자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신문에 어려운 한자와 한문투의 말이 많은것 같은데 신문을 발행하는 목적이 광범한 대중을 교양하자는데 있는것만큼 기사를 누구나 다 읽고 리해할수 있게 조선글로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으며 주체36(1947)년 12월 26일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문학부(당시) 교원들과 하신 담화에서 출판물에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을 쓰는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한자를 써온 력사가 오래고 조선말에 한자가 섞여있는것만큼 한자를 점차적으로 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1월 12일 당시의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안찬동에 내려가시여서는 농민들의 농사일과 생활형편에 대하여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피시면서 이곳 농민들이 문맹을 퇴치하여 조선글을 읽게 되였으나 신문에서 한자를 계속 쓰고있기때문에 불편을 느끼고있다는 사실을 료해하시고 조선글로 신문을 내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뿐 아니라 1월 14일 조선어문연구회(당시) 위원장을 만나시여 지금처럼 한자를 많이 섞어쓰면 인민들이 글을 보고도 그 뜻을 리해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을 써야 한다고 간곡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며칠후인 주체37(1948)년 2월 8일 민주조선사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일군들과 하신 담화에서도 신문에 한자가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정부기관지인것만큼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누구나 다 보고 쉽게 리해할수 있는 조선글을 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은 당기관지의 편집일군들속에서 세차게 일어났으며 뒤이어 정부기관지를 비롯한 학교들에서 리용할 교재를 집필하는데서도 구현되여나갔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8(1949)년 10월 6일 교육성(당시) 일군들과 하신 담화에서 학교교육에서 한자어를 적게 쓰고 조선글을 살려 써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조선어를 발전시키는데서 우리가 일관하게 견지하여야 할 원칙적문제의 하나라고 강조하시였다.

그리하여 주체35(1946)년 봄부터 모든 출판물, 모든 학교의 교재들은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로만 편집발행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37(1948)년에 들어서면서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을 쓰기 위한 운동은 더욱 줄기차게 벌어져 주체37(1948)년말에는 거의 모든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는 현상이 없어지게 되였으며 주체38(1949)년 봄부터는 모든 출판물에서 조선글자를 쓰는 체계가 확립되게 되였다.

하여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이 자주적인 언어생활에 적극 참가하게 되였으며 조선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이 더욱 높아져 조선어의 주체적발전에 유리한 언어적환경이 마련되게 되였다.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에 의한 언어생활기풍이 확립된것은 조선어발전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구현한것으로써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