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이 많아 그 이름 더더욱 빛을 뿌리고있는 조선의 묘향산

 2019.5.25.

조선인민이 묘향산을 명산중의 명산이라고 자랑하는것은 자연이 안겨주는 경치가 아름답고 웅장한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에 조선인민들의 애국적투쟁이야기와 민족의 슬기를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과 유물들이 많아 그 이름 더더욱 빛을 뿌리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유구한 력사를 가진 묘향산에는 주체조선의 국보인 국제친선전람관이 있고 우리 인민들의 애국적투쟁이야기와 민족의 슬기를 자랑하는 문화유적들이 많아 그 이름 더더욱 빛을 뿌리고있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4권 331페지)

묘향산에는 우선 조선인민들의 애국적투쟁이야기를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유물이 많아 그 이름 더욱 빛나고있다.

묘향산에는 고려시기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서북지방농민들의 자랑스러운 투쟁사실과 13세기초 고려에 침입하였던 거란침략자들을 크게 격멸시킨 투쟁사실이 깃들어있다.

특히 조선의 묘향산은 서산대사가 왜적이 침략해왔을 때 중들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 불러일으킨 곳으로서 더욱 유명하다.

오래전부터 조선침략을 준비해오던 일본침략자들은 1592년 4월 드디여 근 2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당파싸움만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해온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의 그릇된 정책의 후과로 말미암아 조선봉건왕조정부는 일본침략군의 불의의 침략을 저지시킬수 없었다. 일본침략자들의 대규모적인 침략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이때 서산대사는 묘향산의 원적암에 있었다. 그는 깊은 산중에 있었으나 전국에 널려있는 제자들을 통하여 이미 국토의 많은 부분이 왜적의 강점밑에 놓이게 되고 나라는 파멸의 위험에 빠지게 되였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이때 서산대사의 나이는 73살이였으나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통문을 보내여 의병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자신은 묘향산 보현사를 비롯하여 평안도지방의 여러 절에 있던 1 500명의 중들로써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애국적호소에 호응하여 강원도 금강산의 유정사에 있던 사명당은 700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고 처영은 전라도에서 1 000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그후 이들은 모두 서산대사의 지휘밑에 한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1592년 8월 서산대사가 지휘한 의병부대는 평안감사 등이 통솔하는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강점한 왜적을 공격하는 작전에 참가하였다. 다음해 1월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평양성해방작전에 참가하였다. 이때 서산대사의 의병부대는 평양성 북쪽으로 쳐들어가 모란봉에 진을 치고있던 적들을 소멸하였다. 서산대사의 애국적인 헌신성과 그가 지휘한 의병부대의 참전은 평양성해방전투의 승리를 보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당시 조선에서 이름난 애국적인 중이였던 서산대사가 거처하였던 동굴인 금강굴과 도를 닦으며 의병투쟁을 벌린 집이 보현사에 원상대로 보존되여있다.

묘향산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민족고전인 《조선봉건왕조실록》을 임진왜란때 보관하였던 력사가 깃들어있는 불영대도 있다. 민족고전 《조선봉건왕조실록》은 1392부터 518년간의 력사적사실을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조선봉건왕조국가의 정부일지이다. 이 책은 국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이 봉건왕권을 유지하고 계급적지반을 공고히 할 목적에서 편찬한것만큼 그 내용에서 시대적제한성을 면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방대한 분량과 독특한 서술체계와 가치있는 자료를 풍부히 담고있는것으로 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묘향산의 불영대에는 임진조국해방전쟁때 일본침략자들의 파괴와 략탈로부터 귀중한 문화재를 구출해낸 애국적소행에 대한 사실도 깃들어있다. 1592년 전쟁이 일어난 후 전라도 태인사람 손홍록과 안의 등은 전주서고에 보관되였던 《조선봉건왕조실록》과 《고려사》를 비롯한 가치있는 민족고전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소개시켰다. 왜적들이 전라도로 기여들 위험성이 조성되자 이들은 그것들을 다음해 배길로 충정도의 아산을 거쳐 황해도의 해주로 옮기였다. 1597년 일본침략자들이 다시 침입해오자 손홍록은 한춘을 비롯한 자기 집종 30명과 함께 무려 50바리나 되는 력사책들을 다시 강화도로 옮기였다. 그후 강화도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배에 실어 안주를 거쳐 먼 후방인 묘향산의 불영암에 날라올려다 보관하였다. 이리하여 소중한 민족문화재들인 《조선봉건왕조실록》과 《고려사》등이 전쟁의 피해를 면하였다.

이외에도 묘향산에는 17세기 전반기 조선에 침입했던 청나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애국적인 투쟁사실도 깃들어있으며 근세시기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벌린 애국투쟁이야기도 깃들어있다.

묘향산에는 또한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이 많아 그 이름 더욱 빛을 뿌리고있다.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유물가운데는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훌륭한 예술적기교를 보여주고있는것도 많다.

그중에서도 절간건물인 보현사는 11세기초의 조선의 건축술을 대표하는것으로서 예술적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보현사는 11세기 전반기에 세워진 고려시기의 절간이다. 보현사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인 대응전은 높지 않은 벽면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경쾌하게 들려있는 합각지붕에 의하여 균형이 잘 잡혀있으며 거기에 류선형으로 배가 부르게 다듬어진 기둥이 조화되여 참으로 보기 좋다. 대웅전은 여러가지 색조를 조화시켜 단청을 화려하게 하여 고상한 건축미를 더욱 부각시키고있다. 대응전의 단청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자기의 고유한 색채를 그대로 나타내고있는데 이것은 예로부터 조선의 단청술이 대단히 발전하였으며 색소의 질도 높았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대응전의 문도 문살을 꽃무늬로 하여 보기좋게 잘 짰으며 청기와도 윤기가 흐르게 잘 만들었다.

이외에도 보현사본사구역내에는 만세루,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관음전, 해장원, 계조암, 령산전, 만수각 등의 옛 건물들이 있다. 그리고 묘향산에는 여러 골짜기들에 보현사에 속하는 상원암, 능인암, 불영대, 보윤암, 화장암, 금강암, 하비로암, 원명사, 고적암, 만수암, 금선암, 법왕암 등 수많은 절간들과 특수한 절간건물인 축성전 등이 있는데 그것들을 통하여서도 조선의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을 엿볼수 있다.

묘향산일대에는 조선인민의 뛰여난 창조적지혜와 예술적재능을 보여주는 탑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대웅전마당에 있는 8각 13층탑과 만세루앞에 있는 4각 9층탑은 조선의 중세기의 발전된 석조건축술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건축물이다. 특히 보현사의 8각 13층 돌탑은 조선중세기의 발전된 석조건축술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 탑은 굳은 화강석을 가지고 마치 연한 나무를 다듬듯이 섬세하게 다듬어 세웠는데 쌓기도 잘하였고 장식도 잘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은 조선민족의 커다란 자랑이다.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유물가운데는 선조들의 뛰여난 인쇄기술의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는것도 있다.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인민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활자를 만들지 못할 때에 벌써 금속활자를 만들어 썼다. 그 대표적인것이 보현사의 대웅전에 보존되여있는 《팔만대장경》과 그 목판이다. 《팔만대장경》과 목판활자는 조선의 인쇄기술의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국보이다. 물론 《팔만대장경》은 불교설교를 위한 책이다. 그러나 조선의 선조들이 수백년전에 무려 활자를 8만여개를 만들어 수천권에 달하는 방대한 대장경을 훌륭히 출판하였다는 그자체가 조선민족의 인쇄기술과 재능을 보여주는 큰 자랑이다.

참으로 묘향산은 풍치수려할뿐아니라 조선인민의 애국적투쟁이야기와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문화유적유물과 잘 어울려 천하절승의 명승지로 그 이름 빛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