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은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서도 빛나는 전통을 창조한 재능있고 지혜로운 문명한 민족입니다.》 (
춘추관은 지난날 우리 나라의 력사편찬을 맡았던 중앙관청의 하나였다.
춘추관의 전신으로서 고려초기에 사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사관 등의 관직이 있었다.
1308년에 사관을 문한서와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만들었다가 1325년에 예문춘추관을 갈라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만들었다. 이때 출현한 춘추관은 1356년에 다시 사관이라고 개칭되였다가 1362년에 또다시 춘추관이라고 불리웠다. 여기에는 재상들이 겸하는 령관사, 감관사와 2품이상의 벼슬아치가 겸하는 지관사, 동지사, 3품이상의 벼슬아치가 겸하는 극수찬관, 극편수관, 겸편수관과 수찬, 주부, 검열 등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또한 구실아치로서 서예와 기관이 있었다.
조선봉건왕조의 수립과 더불어 즉 1392년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만들었다가 인차 갈라서 춘추관을 따로 두었다. 이때 직제가 완비되였는데 령사 1명은 령의정이 겸하였고 감사 2명은 좌의정, 우의정이 겸하였으며 지사 2명, 동지사 2명은 다른 관리가 겸하였고 수찬관 7명은 부제학, 6승지가 겸하였으며 편수관은 당하관이 겸하였다. 또한 기주관, 기사관 등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의정부 사인, 검상, 홍문관의 직제학으로부터 정자, 예문관의 봉교로부터 검열, 승정원의 주서, 승문원의 판교, 종부시의 정이 편수관, 기주관, 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사헌부의 집의로부터 지평, 사간원의 당하관이 기사관을 겸하였다. 6조의 당하관들은 각각 1명씩 륜번대로 기사관에 임명되였으며 8도의 도사, 북평사 및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평안도의 문관고을원들이 또한 기사관을 겸하였다. 이렇게 춘추관은 고위급재상들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관리들로서 그 편찬성원을 이루고있는 국가적기관이였다.
춘추관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바로 왕조실록을 편찬하는것이였다.
고려시기에도 력대실록이 편찬되였지만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서 실록편찬은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해당 임금이 죽은 뒤에 무조건 진행되여야 하는 중대사업으로, 법으로 되여있었다.
조선봉건왕조 519년간의 27대왕에 해당되는 력사적사건, 사실을 담은 조선봉건왕조실록은 바로 춘추관에서 편찬되였다.
《태조실록》으로부터 《순종실록》에 이르는 조선봉건왕조의 각 왕대 실록은 년, 월, 일순서에 따라 기록한 편년체형식의 력사문헌이다.
조선봉건왕조실록은 1 763권, 900여책으로써 포괄기간이 길고 량이 방대할뿐아니라 내용이 다방면적이고 풍부한것으로 하여 세계 그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우월한 우리 나라의 력사문헌유산이다.
여기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는 물론 천문, 기상, 지리, 도덕 및 민간세태풍속에 이르기까지의 사실, 사건들이 날자별로 상세히 기록되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실록에는 임진조국전쟁과 평안도농민전쟁을 비롯하여 우리 인민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반침략, 반봉건투쟁자료들과 《훈민정음》, 거북선을 비롯한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들이 과학문화분야에서 이룩한 성과자료들이 수록되여있다.
참으로 조선봉건왕조실록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 력사연구의 귀중한 자료원천으로 되고있다.
실록편찬이 제기되면 춘추관에서는 수찬관, 편수관, 기사관, 기주관들로 비상설기구인 실록청을 조직하고 그들을 몇개의 방에 나누어 배치하여 해당 왕대의 력사를 일정한 기간씩 맡겨서 편찬하게 하였다.
실록편찬에 리용된 사료원천은 사초(력사초고), 시정기(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파견되여있던 겸임관리들이 그 관청의 정무처리정형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고한것을 년, 월, 일순으로 종합한것), 승정원일기, 서운관기록, 경연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을 비롯한 각 관청들에서 작성한 기록들이다. 여기서 기본은 사초이다. 사초란 사관(력사기록담당관리)들이 평시에 제가 보고 들은것 즉 봉건왕의 정사처리정형과 언행, 관리들의 사업실태나 말을 기록한 력사초고를 말한다.
사관들에게는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고 사실을 기록할 권한이 부여되여있었으며 실록편찬에 앞서 사초를 바칠 때에는 거기에 이름을 쓰지 않고 바치도록 되여있었고 사초를 리용한 후에는 그것을 불태워버리게 되여있었다. 그것은 임금이나 관리들의 좋고 나쁜 점까지도 전부 기록하며 누구의 비위에 맞추어 쓰는 현상을 없애고 《사실그대로》 쓰도록 함으로써 후세의 경험과 교훈으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춘추관에서는 바로 사초를 비롯한 여러가지 기록들에 기초하여 해당 왕대의 사건, 사실들을 년, 월, 일순서에 따라 편찬서술하였다. 이때 실록을 편찬하는 매 방들사이에는 비밀이 엄격히 준수되였다. 편찬완료된 왕조실록은 춘추관에 한질을 남겨두고 강화도,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등의 서고에 보관되였다.
춘추관에서 편찬한 조선봉건왕조실록은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씌여진것만큼 시대적 및 계급적제한성을 내포하고있었다.
그러나 춘추관에서 편찬된 조선봉건왕조실록에는 우리 인민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투쟁을 반영한 자료들과 과학문화자료들, 기후, 풍속자료들이 반영되여있어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따라서 력사편찬기관으로써의 춘추관을 가지고있은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