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김은주
2021.4.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팽이라고 하면 걸을 때에 짚도록 만든 막대기로써 여러 용도에 리용된다는것을 알고있다.
눈먼 사람들은 지팽이가 없이는 걷기가 힘들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지팽이에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멋으로 들고다니기도 한다.
사용용도는 여러가지이나 지팽이는 대부분 불편한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리용되는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위민헌신으로 이어진 우리 수령님의 한평생에는 지팽이가 자기의 사명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때도 있었으니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우리 인민들은 지팽이에 깃든 사연을 알고 어버이의 한평생의 로고가 눈물겹게 미쳐와 더욱 가슴을 쳤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을 훌륭한 인민으로 키워주시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사회주의제도를 마련하여주시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더 큰 행복을 안겨주시기 위하여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하시였습니다.》(《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8권 23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려는 간절한 소원을 푸실 때까지 농민들과 함께 영원히 포전에 계시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80고령의 년세에도 폭열이 쏟아지는 무더위속에서 포전길을 이어가시였다.
돌이켜보면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의 대부분은 농촌의 포전길에서 흘러갔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처음으로 모를 내본다고 말씀하시며 옷을 걷고 논에 들어서시여 한포기 또 한포기 정성껏 모를 내시던 미림벌의 그 봄날로부터 전화의 불비속에서 농민들과 함께 씨앗을 묻어나가시던 원화벌의 그 새벽, 전후의 첫 생신날도 농민들과 함께 보내신 중화벌의 그 못 잊을 추억을 넘어 청산리와 리현리, 연백벌, 금당벌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포전들에는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의 자욱이 뜨겁게 새겨져있다.
세계가 공인하는 정치원로이시며 한 나라의 수반이시였지만 우리 수령님의 옷주머니에는 늘 물온도계가 들어있었고 나라의 방방곡곡을 찾으시던 그이의 승용차에는 언제나 농민모가 놓여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들판에 넘쳐나는 구수한 낟알향기에 평생의 시름이 다 풀린다고 하시며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논두렁길을 걸으신데 대하여서는 잘 알고있으나 그 포전길이 얼마나 큰 육체적부담과 과로가 실린 현지지도였는가를 다는 알지 못하였다.
중국의 시인 두보는 《인생 70은 자고로 드물다》라고 한적이 있다. 그만큼 옛날에는 70살을 맞는 사람이 적기도 했거니와 70살을 맞는것을 천명으로 생각한데도 있었으며 이 나이가 되고보면 건강을 유지하는것자체가 힘들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칠순이 아니라 팔순을 넘기신 불편한 고령의 몸이시였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인민을 위한 농촌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2(1993)년 9월 중순 어느 일요일 황해남도 과일군 과수종합농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한 일군이 드리는 지팽이를 받아드시고 자신께서 지팽이를 짚는것을 보면 인민들이 가슴아파한다고 하시면서 차안에 지팽이를 두고 내리시였다.
80고령의 년로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시간 현지를 돌아보시면서 지팽이라도 짚으시면 다소 편하시련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이 걱정할것을 생각하시며 그것마저 마다하시는것이였다.
육체적피로를 푸실 사이도 없이, 불편하신 몸을 치료하실 사이도 없이 인민생활을 위해 1년 사계절 농장벌을 찾고찾으신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는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체83(1994)년 6월 19일 일요일에도 온천군 금당협동농장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이 바람세찬 날씨에 험한 길을 걸으시면 안된다고 말씀올리자 인민들이 잘살게 되면 그 어떤 험한 길도 얼마든지 걸을수 있다고 하시면서 포전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이젠 그만 돌아가실것을 거듭 말씀올리는 일군들에게 이런 바람을 많이 맞아야 풍년가을을 본다고 하시면서 계속 포전길을 걸으시며 농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하지만 우리 인민은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우리 수령님께서 이어가신 그 포전길이 지팽이에 의지해서 걸어야 하는 힘든 걸음이였다는것을, 우리 수령님께서 인민들이 가슴아파할가봐 차에 지팽이를 그대로 두신채 포전길을 걸으시였다는것을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에야 알게 되였다.
우리 수령님도 인간이시였고 휴식을 필요로 하시였다.
하기에 주체83(1994)년 4월 16일 어버이수령님 탄생 82돐을 뜻깊은 명절로 경축한 다음날 일군들이 생신날에도 사업부담이 너무 많아 몹시 피로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휴식을 하셔야 하겠다고 간절히 말씀올린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도 쉬고픈 때가 많다고, 정말 이제는 나이 80살을 넘기고보니 일이 힘들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다니면서 편히 휴식을 하고싶다고, 그럴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것이 인민들의 생활이 높아지지 못하는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시며 인민을 그토록 사랑하신 우리 수령님이시기에 인민생활향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면서도 인민들이 가슴아파할가봐 자신의 육체적아픔을 감추시며 생애에 단 한번도 자신의 이런 아픔과 육체적고통을 우리 인민에게 터놓지 않으시였다.
예로부터 《자식은 부모사랑 절반이면 효도한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온 나라 대가정의 아버지로 스스럼없이 부르며 그 품속에서 행복만을 알고 자랐기에 우리 인민은 그 행복에 겨워 어버이수령님의 육체적과로와 아버지의 아픔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였다.
하기에 우리 인민들에게 안겨오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은 언제나 온 세상이 환하게 웃으시는 태양상이다.
그러나 그 태양과 같은 환하신 미소속에 인민을 위해 바치신 우리 수령님의 천만로고로 이어진 모진 육체적아픔이 담겨져있었다는것을 우리 인민은 알지 못하였다.
정녕 우리 수령님은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고령의 불편하신 몸으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초인간적인 정력으로 포전길을 이어가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