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혁명투사 공영

 2026.7.7.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혁명적동지애의 최고화신이시였다.》

항일혁명투쟁시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직하게 받든 혁명전사들중에는 만경대일가분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고있던 공영동지도 있다.

고향이 평안북도 벽동군인 공영동지는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확대해나가시던 1910년대 후반기에 반일독립운동에 나섰으며 독립군에서 활동하면서 김형직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24년 12월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였다가 탈출하신 김형직선생님을 모시고 무송으로 오던중 마적들에게 붙잡혀 뜻밖의 위험이 조성되자 놈들을 격술로 쓰러뜨리고 김형직선생님을 구출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신 후 공영동지는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 오래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의리를 지켰다.

그후 공영동지는 리제우, 박진영을 비롯한 독립군시절의 전우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항일혁명투쟁대오에 들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카륜회의와 조선혁명군결성이후 그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국내공작소조를 무어 평안북도일대로 진출하면서 광범한 대중속에 혁명조직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맡기시였다.

그러나 일제의 마적단과 결탁된 중국반동군벌군대의 습격을 받아 박진영동지는 전사하였고 리제우동지는 체포되여 옥중에서 희생되였으며 공영동지는 1930년 여름 일제가 조작한 가짜공산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하려다가 살해되였다.

공영동지와 그의 전우들을 아버님께서 제일 사랑하시던 독립군대원들이라고 남달리 아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희생된 소식을 들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영동지가 희생된 후에도 그에 대한 고결한 혁명적의리심을 변함없이 간직하고계시였다.

언제나 그를 잊지 못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가족들의 생사를 두고 마음쓰시며 해방직후인 1946년 2월 28일에도 농민조합련맹대표대회에 참가한 벽동군대표를 몸가까이 부르시여 자신을 대신하여 공영의 가족을 꼭 찾아보아야 하겠다고, 공영의 가족을 찾으면 즉시 그들을 자신께 보내든가 그렇지 않으면 서신으로라도 자신에게 알려주어야 하겠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안북도에 내려가실 때마다 공영동지의 유가족들의 행처를 수소문하시였으며 만경대혁명학원 원아들이 명랑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실 때면 공영동지의 안해와 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짜릿한 심회에 잠기군 하시였다.

그리고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시여 마침내 1967년에 공영동지의 딸을 찾으신 후에는 당학교를 졸업시켜 평양시당과 혁명사적부문에서 일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영동지와 그의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신 사랑은 위인의 품속에서 혁명가의 참된 삶이 시작되며 수령을 받드는 길에 전사의 생은 빛난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겨주고있다.

공영동지가 희생된 때로부터 어느덧 한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세대도 바뀌였다. 그러나 조선혁명을 피로써 개척한 첫세대혁명가들, 공영동지를 비롯한 혁명선렬들의 이름과 모습들, 고귀한 혁명정신은 절세위인들의 무한한 동지애의 세계와 더불어 영원토록 길이 전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