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오매리절터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사람들이 남긴 조선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들중의 하나이다.
오매리절터는 함경남도 신포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오매리의 뒤산넘어 절골에 있다.
절골은 압해산 앞봉우리에서 흘러내린 금산을 비롯한 가지산줄기들에 의하여 둘러싸여있는데 오매리절터는 바로 절골막바지의 넓은 대지와 그것을 둘러싼 일부 릉선들을 차지하고있다.
이 절터에 대한 발굴과정에 크게 2개의 문화층이 드러났는데 밑에 놓인 문화층이 고구려시기의 문화층이고 그 우의 문화층이 발해시기의 문화층이라는것이 밝혀졌다.
발해시기의 문화층에서는 부처머리와 평면이 4각형인 나무탑터가 발견됨으로써 이것이 절터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오매리절터는 남북 약 100m, 동서 약 60m의 범위를 차지하고있다. 여기에서는 기본건물터들이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였다.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건물터들가운데서 맨 뒤에 있는것이 본전터이다. 본전터의 좌우에는 각각 한개의 건물터가 있고 마당의 한가운데 4각나무탑터가 있다. 나무탑터는 동서 12.3m, 남북 12.5m로서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0.74m이다. 탑터의 중심에는 탑심초가 남아있다.
이밖에 탑의 좌우에서도 건물터들이 알려졌다.
오매리절터에서는 기와, 괴면, 벽돌들과 도기, 자기, 거울, 청동기, 철기 등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한편 이 건축터의 제일 북쪽에서는 남향으로 된 건물터가 드러났다.
이 건물터는 서로 련결되였는데 동쪽의것이 본채이고 서쪽의것은 달린채이다. 여기서는 ㄱ평면으로 된 온돌시설이 나왔다.
온돌은 고구려시기에 널리 리용하던 조선민족의 고유한 난방시설로서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였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오매리절터는 기본건축터와 여러개의 부속건물들이 결합되여있는 규모가 큰 절터였다.
오매리절터의 건축평면을 보면 기본건축군은 중심축선상에 문, 탑, 본전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대칭되게 건물들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구조를 이루는데 이것은 정릉사터, 금강사터와 같은 고구려절의 가람배치형식과 동일하다.
오매리절터의 문화층관계와 기본건축터의 가람배치, 온돌난방시설을 갖춘 건물터들 그리고 문화층에서 발굴된 유물 등은 이것이 고구려문화층우에 세운 발해시기의 절터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지난 시기 중국 동북지역과 로씨야 연해주일대에서도 발해시기의 절터들이 발견되였다.
중국 동북지역의 발해절터가운데서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는 흑룡강성 녕안현의 상경룡천부 1절터에서는 본전터와 그 좌우의 건물터, 9절터에서는 본전터만 발굴되고 탑터는 나오지 않았다.
또한 최근 시기 중국 길림성 훈춘시 고성촌에서 발견된 발해절터인 고성촌1호절터에서는 불상조각과 기와쪼각과 같은 일부 유물들만 나오고 건축터는 이미 다 파괴되였다.
로씨야 연해주일대의 대표적인 발해절터인 아브리꼬쏘브절터에서는 둘레에 쌓은 담장의 일부와 본전터만이 발굴되였다.
오매리절터는 중국 동북지방과 로씨야 연해주일대에서 발굴된 발해절터들과는 달리 문터, 탑터, 본전터와 보조건물터들이 다 알려진것으로 하여 그 자료적가치가 매우 크다.
참으로 오매리절터는 발해문화가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발해는 조선민족의 나라였다는것을 실증하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