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원 송정은 우리 나라 명승의 하나입니다.》 (
세상사람들로부터 명승의 나라로 불리우는 조선에는 10여리나 되는 바다기슭을 따라 사철 푸르싱싱한 소나무숲이 길게 펼쳐진것으로 하여 만사람의 경탄을 자아내는 조선의 명승-리원 송정도 있다.
함경남도 리원군의 조선동해기슭에 위치하고있는 송정에는 원래 나무 한그루 없이 바다가주변에 흰 모래만 넓게 깔려있어 주변경치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1834년에 편찬된 민족고전 《리원읍지자료집》에 의하면 17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해안가에 방풍림이 조성되지 않은것으로 하여 동해의 푸른 물결이 륙지우에까지 밀려들었고 농사철에는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벌과 밭들을 거침없이 휩쓸어 밀과 곡식이 제대로 여무는 때가 없었다고 한다.
해풍으로 인한 불리한 자연기후조건으로 해마다 흉작이 거듭되였건만 관가에서는 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논밭면적에 따라 부과한 전세 전량을 깡그리 수탈하다보니 남대천웃쪽지역 백성들의 생활형편은 날을 따라 령락되여만 갔다.
해양성기후피해로 인한 자기들의 농사작황과 쪼들려만가는 생활처지에 대하여 관가에 몰려가 안타깝게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어느 한 관리도 전세의 축감은 커녕 백성들의 기아와 빈궁에 대하여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관가의 가혹한 수탈행위와 몰인정한 무관심성에 격분한 백성들은 너도나도 해안가의 모래불에 알곡소출을 위한 방풍림을 조성하리라 결심하고 1643년부터 남대천남쪽의 10여리되는 드넓은 백사장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집체적지혜와 피타는 노력에 의하여 백사장에 심어놓은 애솔나무들은 한그루한그루 모래불에 뿌리를 내려 근 20년이 되는 해에 와서는 솔숲을 이루게 되였다.
한산하던 모래벌에 저 하늘의 별무리마냥 소나무들이 총총하게 자란다고 하여 이 지역을 《星》(별 성)자에 《林》(수풀 림)자를 붙여 성림(星林)이라고 불렀다.
남대천남쪽지역의 백성들이 아무리 애쓴다고 하여도 수수천년 바다물에 절은 모래밭에서는 소나무가 살아날리 만무하다고 도리머리질을 했던 남대천북쪽지역의 백성들은 강건너 백사장에서 소나무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는 한편 그곳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 자기들의 처사를 놓고 후회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네 고장도 봄철이 오면 온갖 품을 들여 논과 밭들에 벼와 보리를 심어놓고 여름내내 갖은 정성을 기울였건만 가을에 와서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언제한번 오돌차게 여문 곡식이라군 한이삭도 거두어들이지 못한것은 물론이요, 그나마 전세의 명목으로 깡그리 수탈당하다보니 백성들이 살아갈 길은 날이 갈수록 암담하기 그지없었던것이다.
강건너 사람들처럼 모래벌이 아니라 설사 돌밭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지혜를 쏟고 땀을 뿌린다면 능히 나무를 재배할수 있다는것을 확신하게 된 남대천북쪽의 강익주, 리동백, 박상해, 최성길, 김석진과 같은 사람들은 1661년 자기 지역 백성들에게 한사람같이 떨쳐나 해변가의 모래밭에 소나무를 심을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선 이 지역사람들은 강건너에서 소나무를 심고 가꾼 풍부한 경험에 토대하여 넓은 백사장에 온갖 지성과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포기포기 애동솔을 심어나갔다.
서로서로의 지혜와 힘을 기울인 결과 남대천북쪽의 바다기슭에도 소나무숲을 이루게 되였으니 이 지역을 《成》(이룰 성)자에 《林》(수풀 림)자를 합쳐 성림(成林)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되여 17세기 후반기에 와서는 리원앞바다로 흘러드는 남대천의 량옆 백사장들에 소나무숲이 펼쳐지게 되였던것이다.
남대천북쪽의 솔숲보다 18년 먼저 심은 남대천남쪽의 소나무들은 60여년이 지난 1704년에 와서는 하나같이 곧게 자라면서 느티나무와 같은 모양새를 이루었다.
바다가에 길게 늘어선 무성한 소나무숲이 해풍을 막아주는 좋은 방풍림으로 되고보니 해마다 드넓은 논밭들에서는 알차게 여문 곡식들이 물결치게 된것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백사장에서는 향기로운 해당화들이 서로서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게 되였다.
사시장철 푸르싱싱하게 자라나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푸르른 바다, 철썩이는 파도, 드넓은 백사장, 붉게 타는 해당화와 어울려 기이한 명승을 이루게 되자 그 명성은 한성은 물론 각 고을에까지 파다하게 번져갔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길손들은 찬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이렇게 되여 농사철에는 바다바람을 막아주어 풍년을 거두게 하고 여름철에는 그늘을 지어주어 더위를 가시게 하며 사계절에는 푸르름을 더해주어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하는 백사장의 소나무숲에 대한 이 지역 백성들의 애착심은 날이 갈수록 커만 갔으며 관가에서까지도 소나무에 대한 도벌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였다.
자기 고장의 명성이 해송으로 온 나라 방방곡곡에 자자하게 되자 1704년 이 지방의 유생 강상함은 남대천남쪽의 소나무수림지대를 성림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남송정으로 고쳐지었으며 1728년 남대천북쪽에서는 남송정이라는 솔밭이름이 이미 지어진데 맞게 저들이 심은 소나무밭을 동송정이라고 개칭하였다.
송정이라는 이름은 소나무로 지은 정자나 소나무숲에 세워놓은 정자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정자나무처럼 생긴 소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지은것이였다.
백성들이 심어놓은 송정의 소나무경치가 하도 아름답고 훌륭하여 리원현감은 한성에 가서 자기 고을의 솔밭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으며 이로 하여 조선력사에는 《리원현감의 솔자랑》이라는 옛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였다.
각 고을의 읍지를 수록해놓은 1760년대의 민족고전 《여지도서》에서는 문성암, 쌍석대, 신루암, 천초도와 함께 남동쪽의 송정을 리원의 5대명승으로 꼽았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어놓은 리원 송정이였건만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300년이나 자란 백사장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무참히 람벌한것으로 하여 유구한 력사와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던 송정의 소나무숲은 번대머리처럼 휑하게 되였고 바다가의 눈부시던 경치는 심히 손상가서 꼴불견이 되고말았다.
주체38(1949)년 8월 27일 리원 송정을 찾아오신
주체56(1967)년 7월 26일 송정리를 찾아주신
오늘 리원 송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