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혁명의 1선에서 무장을 잡고 강도일제를 상대로 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려온 조선인민혁명군의 녀대원들은 조선녀성들의 빛나는 귀감이며 인류해방투쟁사에서 참다운 전형으로 내세울수 있는 녀성영웅들이였다.
그들은 녀성들의 사회적, 인륜적평등을 남먼저 이룩하고 우리 나라 녀성해방의 길을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였다.
우리 녀성들이 장구하고 간고한 항일의 20성상을 헤쳐오면서 력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위훈사를 수놓을수 있은 중요한 요인은 녀성들을 혁명의 길, 투쟁의 길로 이끌어주고 세심히 보살펴주신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녀성들은 집안일을 보는것이 조상전래의 관례이고 녀성들이 어떻게 험한 산발을 타고다니며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유격활동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녀성들의 입대문제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지하조직들에서 활동하던 녀성들가운데는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들어와 승인도 없이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따라서 유격대오에는 녀성대원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였다.
비록 총은 잡았어도 녀성은 역시 녀성인것만큼 유격전쟁을 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녀성고유의 생활을 유지해나갈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겠다는것이
부대에서는 녀대원들에게 총도 제일 좋은것을 주었고 잠자리도 제일 아늑한 곳에 정해주었으며 전리품도 제일 훌륭한것으로 골라서 분배하였다.
녀대원들만으로 따로 중대를 조직하게 되면 그들의 혁명적자부심과 열의도 한층 더 높여줄수 있고 자각성과 전투력도 최대한으로 발양시킬수 있으며 생활상불편도 덜어줄수 있다고 보시였던것이다.
당시 전투원이 되게 해달라, 총을 잡고
그때 《민생단》혐의를 받고있던 장철구, 김확실을 비롯하여 녀대원들이 적지 않았으며 박록금처럼 개별적으로 찾아온 녀대원들도 여럿이였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새 사단에 편입한 군소부대와 함께 집단적으로 찾아온 녀대원들도 여럿이였다.
만강부근에서 녀성중대조직준비를 한창 하고있을 때 불쑥 혼성부대가 나타났다.
남녀혼성이라지만 그속에 남성대원은 4~5명뿐이고 나머지는 김철호, 허성숙, 최장숙, 황순희를 포함하여 전부가 녀성들이였다.
그들이 만강으로 오면서 겪은 전투에서 발휘한 남대원들 못지 않은 투지, 대담성과 용감성, 견인불발성은 유격대원들을 크게 감탄시켰다.
녀성중대는 우리 나라 군건설력사상 처음으로 생겨난 녀성전투구분대였다.
녀성중대의 탄생, 그것은 봉건적질곡에 의해 수천년동안 뒤고방에 갇혀있던 우리 조선의 녀성들이 혁명투쟁의 제1선에 당당히 나섰다는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
《녀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였고 진귀한 꽃이였다.》
녀성중대는 세상에 태여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어디에 가나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였다.
혁명군에 녀성중대가 있고 그 녀성중대의 대원들이 남성군인들 못지 않게 잘 싸운다는것은 미구에 전민족이 다 아는 사실로 되였고 세계를 경탄시키는 의의있는 화제거리로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녀대원들은 무송현성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장들마다에서 혁명의 사령부를 목숨으로 사수하면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그들은 어느 전투에서나 잊을수 없는 무훈담을 남기였다.
대영전투와 동강전투는 녀성중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한 전투였다. 장정숙은 대영전투때 총알이 아까와서 적보초를 주먹으로 단매에 쳐눕히고 돌격로를 열었다. 김확실을 비롯한 3명의 녀대원이 어스름한 달빛속에서 각각 한발씩 총을 쏘아 적의 경비전화선을 잘라버렸다는 신비한 이야기는 동강전투가 남긴 기담이였다.
녀성중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관하의 함경남도경찰부가 여러건의 기록을 남겼다.
거기에는 녀대원 박록금이하 40여명이 소화11년(1936년) 음력 5월 초순경 무송현 시난차의 위만군수비대를 공격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같은 시기에 그들이 대영을 습격하여 장총 10여정과 군복 등을 로획해갔다는 사실도 기록되여있었다.
참으로 녀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였고 진귀한 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