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중세의 명필 김생

 2016.7.28.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서예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나라들에서 오래전부터 발전하여온 독특한 형식의 예술이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5권 461페지)

김생(711-?)은 8세기에 활동한 신라의 명필, 서예가였다.

김생은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매우 즐겨했고 80살이 넘도록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글씨를 련마하였다. 그는 석굴(《김생굴》이라고도 함)에 들어가 나무잎에 글씨를 쓰면서 40년이나 나오지 않고 신묘한 필법을 체득하였는데 이때 그가 얼마나 글쓰기를 꾸준히 하였는지 그가 먹을 갈아서 쓴 나무잎들이 샘물에 흘러들어 물을 까맣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김생은 예서(네모난 모양으로 쓴 한자글씨체), 행서(약간 흘려서 쓴 한자글씨체), 초서(심하게 흘려쓴 한자글씨체) 등 여러가지 글씨체를 다 잘 썼으며 력대 명필들의 좋은 기법들을 받아들이면서 힘찬 박력을 가진 자기의 독자적인 필법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떨쳤으며 력대 학자들과 서예가들도 그의 글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13세기에 편찬된 리규보의 《동국리상국집》에서는 고려이전의 4대명필을 들면서 김생을 첫자리에 놓았고 같은 시기에 편찬된 리인로의 《파한집》에서는 《계림사람 김생이 붓쓰기를 귀신같이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15세기의 학자이며 패설작가였던 성현은 자기의 패설집인 《용재총화》에서 우리 나라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비록 많으나 행서를 잘 쓰는 사람은 적은데 김생은 재능있는 서예가로서 아무리 가는 글씨라도 다 정묘하게 썼으며 섬세하되 털끝만치도 소홀한데가 없고 모두가 정교하다고 하면서 그의 높은 서예기능을 찬양하였다.

김생의 필체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뿐아니라 이웃나라의 학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12세기초 고려의 학자였던 홍관이 송나라에 가서 그곳의 관료들인 양구, 리혁 등에게 김생이 쓴 책을 보여준적이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책을 보고 중국의 진(晋)나라때의 명필이였던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줄 몰랐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김생의 글씨라고 하자 천하에 왕희지가 아니고서 이렇게 훌륭한 글씨를 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면서 대단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렇듯 김생은 이름난 서예가로서 많은 일화와 기록들을 남겼으나 그의 글씨를 보기는 어렵다. 그의 필적은 없어진지 오래고 현재 탑본이 있는데 고려초기에 세운 백월서운비가 유명하다. 이 비석은 그가 죽은지 100년이 지난후에 그의 글씨 2 573자를 모아 《글자모임비》형식으로 만든것이다.

참으로 김생은 우리 나라 중세서예사에서 손꼽히는 명필, 서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