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증보문헌비고》(시적고)를 통하여 본 조선봉건왕조시기 한성장시

 2016.3.18.

《증보문헌비고》는 우리 나라 고대중세의 정치, 경제분야의 제도와 문화를 부문별로 나누고 다시 항목별로 분류정리한 하나의 사전적인 성격을 띤 류서이다.

《증보문헌비고》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담고있는 내용이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여기에서 이채로운것의 하나가 조선봉건왕조시기 한성장시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자료들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원래 장이란 말은 사회주의제도하에서 생겨난 술어도 아니고 자본주의제도하에서 생겨난것도 아니며 봉건사회때부터 내려오는 술어입니다. 봉건시대에 수공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장이라는것이 생겨났습니다.》 (《김일성전집》 제43권 22~23페지)

우리 나라에서 장은 일찌기 세나라시기에 수공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생겨났다. 그것은 오래 세월을 지나오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였다.

가게는 부녀들의 푸주간(소고기, 돼지고기따위의 고기를 파는 가게)에서 기원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 163, 시적고1 저자항목에는 《날마다 아침저녁이면 부인들이 하나의 버들상자에 작은 되를 가지고 저자로 나갔다. 6홉이 한 되로 되였으며 정미한 쌀로써 물건의 값을 정하였는데 교환하는 모든 물건의 값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서 장시는 처음에 가게(저자)에서 기원되여 작은 규모로 진행되여오다가 점차 규모가 커지고 거기에서 생활필수품을 정미한 쌀을 기준으로 하여 팔고사는 방법으로 운영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장은 그후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발전하여오다가 특히 조선봉건왕조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분업이 확대되고 수공업제품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더욱 급속히 발전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서 장(장시)은 그 이전시기에 비하여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1473년(성종 4년) 2월 신숙주가 장시에 대해 말하면서 《성종원년(1469)의 흉년때에 전라도 한개 도의 백성들이 서로 집합하여 시포(市舖)를 개설하고 장문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에 의지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1고 한것과 1509년(중종 4년) 6월 대사헌 권홍(權弘)이 《전라도에서 장문이라고 하는것은 한성의 저자(市)와 같다. 이전에 고대필(高台弼)이 관찰사로 되였을 때 흉년으로 인하여 장문을 설립하여 진휼의 방책으로 삼았다》*2고 한것을 보면 장시가 15세기중엽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1 《성종실록》 권 27, 4년 2월 임신

*2 《중종실록》 권8, 4년 6월 갑자

조선봉건왕조시기 장시는 한성에서 가장 발전하였다.

그것은 한성이 중앙집권적봉건국가의 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인 동시에 전국잉여생산물의 주요부분을 독차지한 최대의 소비도시였던것과 관련되여있다.

1426년(세종 8년) 현재 한성의 호구수는 성외를 제외하고도 1만 6 921호에 인구가 10만 3 328명에 달하고있었는데*3 그중의 일부는 이전의 수도 개성으로부터 옮겨온 백성들과 량반, 상인, 수공업자들이였다.*4

*3《세종실록》권40 10년 윤 4월 기축조. 한성부에서 제의하기를 《병오년 호적이 이제와서야 완성되였습니다. 수도의 5부에는 호수가 1만 6 921호, 인구가 10만 3 328명, 관령이 46명이며 성 바깥 10리주변에는 호수가 1 601호, 인구가 6 044명, 관령이 15명으로서 백성들을 키우고 인구를 늘이는 일이 잘되였다고 말할 만합니다.》

*4 《태종실록》권 17, 9년 3월 병오

류후가 글을 올리기를 《옛 수도의 백성들이 장공인, 장사군들과 섞여 살면서 유무를 상통하여오다가 수도를 옮긴 이후로부터 가게방을 내지 못하게 되였습니다.…큰 장사군들로서 옮겨가기를 싫어하는자들을 강제로 새 수도에 이사시키는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각기 가게방을 내게 해서 물건매매에 편리하게 할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후 약 50년이 지나 성종시기에 이르러서는 한성의 모습이 전혀 몰라보게 변모되여 한성장안의 인구가 옛날의 10배로 증가되고 집들이 성밖에까지 즐비하게 늘어섰다.*5

*5 《용재총화》 권 1

이것을 통하여 당시 한성에서의 호구의 증대와 변화된 거리 그리고 상품의 흥성함을 볼수 있는데 이처럼 많은 주민들의 생활필수품은 모두 시전(가게)을 통하여 해결되였다.

참고적으로 말한다면 장시는 지금의 장 즉 시장을 이르는 말이고 시전은 장시에 있는 개별적인 가게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한성에는 많은 시전들이 있었다.

조선봉건정부는 1398년(정종 원년)에 호구수가 증대되는 조건에 맞게 좌우행랑 8백여칸이나 되는 시전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혜정교로부터 창덕궁골입구에 이르렀고 1410년(태종 10년)경에는 벌써 한성장안의 여러곳에 시전들이 있는 구역들이 생겨났다.

1414년(태종 14년)에는 좌우행랑 8백여칸을 동대문까지 연장하는 동시에 종루(鍾樓)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행랑도 새로 건설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시인(市人)이외에 소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거리마다에 설치되였다.

이렇게 확장된 한성시전은 유분각전과 무분각전으로 나누었다.

유분각전은 《분》이 있는 각 시전을 말한다.

《분》이란 《국역》에 응하는 몫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봉건정부는 시전의 상인들에게 지어놓은 행랑을 빌려주고 공랑세(公廊稅)를 징수하였으며 시전세(市廛稅)이외에 각 시전들에 따로 《국역》을 부담시켰다.

《국역》을 부담하는 몫은 1부터 10까지인데 10에 해당되는 값을 내는 시전은 10분전(十分廛)*6 , 7에 해당한 값을 내는 시전은 7분전(七分廛)이라고 하였다.

*6 《증보문헌비고》권 163, 시적고1 저자

시전들의 《국역》이라고 할 때 그것은 전매특권의 대가로서 궁정과 정부에서 수시로 필요한 잡다한 비용을 부담시킨것을 말한다.

례하면 궁궐과 관청의 수리, 도배, 국상을 당했을 때와 국가적인 혼례때의 비용, 릉(陵), 원(園), 묘(墓)의 건조 또는 이전비, 왕궁에서 세우는 사원의 건립비, 외국사신의 접대비, 전시의 군자금 등을 각 시전에 일정한 비률로 부과시킨것을 말한다.

이 《국역》을 본래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일정한 비률로 부과하였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1년에 얼마씩으로 고정하였다.

유분각전에는 크게 륙주비전(六矣廛, 六注比廛)이 있었고 그외에 포전(布廛), 연초전(烟草廛), 외어물전(外魚物廛), 생선전(生鮮廛), 잡곡전(雜穀廛), 유기전(鍮器廛), 은전(銀廛), 의전(衣廛), 면자전(綿子廛), 리 전(履廛), 화피전(樺皮廛), 인석전(茵蓆廛), 진사전(眞絲廛), 청밀전(淸密廛), 경염전(京鹽廛), 내장목전(內長木廛), 철물전(鐵物廛), 연죽전(烟竹廛), 우전(牛廛), 마전(馬廛)을 비롯하여 41개의 가게가 있었다.

이가운데서 미전 5곳(米廛五處)에 속한 서강미전(西江米廛), 마포미전(麻浦米廛)과 상전 13곳(床廛十三處)에 속한 포상전(布床廛), 철상전(鐵床廛), 필상전(筆床廛), 남문상전(南門床廛), 염상전(鹽床廛), 정릉동상전(貞陵洞床廛), 구리현상전(九里峴床廛), 지상전(紙床廛) 등 8개의 시전은 속칭 상자리전(廂貲利廛)이라고 하는데 말꼬리, 초, 향사 등의 잡다하고 소소한 물건을 파는 가게이므로 분이 없다.

그러므로 미전 5곳에 속한 2개의 가게와 상전 13곳에 속한 8개의 가게 도합 10개의 시전을 제외한 나머지 31개의 가게에 륙주비전을 합하여 37개의 가게가 《국역》의 의무를 지니고있었다.

무분각전은 분이 없는 각 시전 즉 《국역》의 의무를 지니지 않은 각 시전을 말한다.

무분각전에는 외장목전(外長木廛), 채소전(菜蔬廛), 모전(毛廛), 혜정교잡전(惠政橋雜廛), 세물전(貰物廛), 량대전(凉臺廛), 잡철전(雜鐵廛), 염전(鹽廛), 백당전(白糖廛), 계아전(鷄兒廛), 좌반전4곳(佐飯廛四處), 리저전(履低廛), 남문외염전(南門外鹽廛) 등 40여개가 넘는 시전이 있었다.

이외에도 소소한 필수품을 파는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조선봉건정부는 평시서로 하여금 각 시전들이 장내에 제정된 질서를 지키도록 통제하고 도량형을 제정하며 물가를 낮추고 높이는 등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평시서는 각 시전의 상인들에게 세인(세금을 냈다는 도장)을 박은 증서를 발급해준 후에야 매매를 진행하게 하였으며 도장을 박은 증서가 없이 매매하는 상인은 엄하게 처벌하였다. 그리고 장공인의 등급과 자리를 잡고앉은 장사치들이 리용하는 국가건물의 칸수를 례조와 공조에 등록하여 보관해놓고 세금을 받았으며 행상인들에게는 통행증을 발급하고 세금을 받았다.

봉건정부는 장시의 설치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것처럼 표방하였으나 실제적으로 봉건통치배들은 장시를 통하여 저들의 리익을 추구하였고 시전의 백성들은 2중3중의 착취를 당하였다.

첫째로, 봉건정부가 장시를 통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착취하였다.

무엇보다먼저 봉건정부는 시전의 상인들에게서 세금이외에 여러가지 명목으로 그들의 상품을 수탈하여 장사군들이 살아가기가 어렵게 하였다.

봉건정부는 급히 필요하여 거두어들여야 할것이 있을 때에 시전의 상인들에게서 하나하나 징수해갔는데 말로는 산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빼앗아갔다.

이것은 당시 체찰사 리항복의 상소문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국가에는 무릇 때때로 급히 취할것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를 시전에서 나누어 징수해갑니다. 그것을 무역이라고는 하나 실제는 값을 주지 않으니 이것은 빼앗아가는것입니다.》*7

*7 우와 같은 문헌

여기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봉건통치배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건을 파는 시장의 상인들에게서 여러가지 명목으로 파는 물건을 빼앗아 갔다.

그리하여 시전의 상인들이 견디기 힘들어 류랑하는 현상이 그칠새없었고 심지어 한성의 상인들이 지방으로 흩어져서 한성에서는 물물교환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다음으로 가게를 문란하게 하는 현상이 생겨나 백성들이 살아가기 어렵게 되였다.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자기들이 만든 물건 즉 방패나 세간집물을 시장에서 란매하였는데 그것이 너무도 성행하여 봉건정부는 할수없이 그들에게 《사패》를 만들어주고 시역(시전들의 《국역》)의 5분의 1에 응하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가게가 더 문란해지고 시장의 백성들은 자기의 물건을 제대로 팔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함께 모리간상배들에 의하여 물건값이 임의로 뛰여올라 물건의 매매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으며 거간군들은 말과 되를 가지고 팔 때에는 작은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에는 큰되를 사용하여 시전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시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또한 토호들과 권세가 있는 집들에서는 시전을 자기 집의 바깥창고처럼 생각하면서 마음대로 시민들의 물건을 빼앗아가고 값을 주지 않아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였다.

당시 시전에서 생겨난 페단은 또한 도고와 계방이다.

1759년(영조 35년) 령의정 흥봉환의 장계는 《근래에 백성들의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운 페단은 도고와 계방입니다. …도고라는것은 재물을 모두 모아서 그 리익을 독차지하고 모든 물건이 한곬으로만 모여들게 하여 다른 백성들은 손에 쥘수 없게 하는것입니다.

계방이라는것은 관속에 각기 체결한 면이 있어서 개인의 군역과 잡역은 모두 막아주고 다른 면의 백성들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거나 횡령하여 란잡하게 침해하는것입니다. …》*8

*8 우와 같은 문헌

여기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도고와 계방은 시전을 문란하게 하여 시전의 상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한성에서는 류통되는 모든 상품들이 어용상인들의 수중에 들어가 그들이 그 리익을 독차지하여 다른 상인들은 물품을 손에 쥘수 없게 하는 도고가 심했다.

지방에서는 장사군들이 지방관청의 관리들을 끼고 개인의 군역과 잡역은 모두 다른 면의 백성들에게 넘겨씌우는 계방이 심했다.

봉건정부가 어용상인들을 끼고 상품을 전매하여 그 리익을 독차지하니 시장의 물가가 뛰여오르고 시전의 다른 상인들과 백성들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였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페단들이 생겨 시전의 상인들,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

둘째로, 한성시전의 일반상인들은 어용상인들에게서도 착취를 당하였다.

륙주비전을 비롯한 한성의 시전들은 전통적으로 봉건통치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었을뿐아니라 《국역》을 부담하는것으로 하여 봉건정부로부터 일정한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보장받고있었다.

어용상인들의 점방(상점)인 륙주비전을 비롯한 한성의 시전들은 왕실과 중앙관청들에서 요구하는 상품을 수시로 공급할 의무를 지는 대신 국가가 인민들로부터 수탈한 공물과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상품을 사서 팔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륙주비전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장받은 저들의 상업적독점권을 침해하는 다른 시전인이나 기타 상인들의 상업행위를 단속할 권리까지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관권을 등대고 다른 상인들이 륙주비전에서 파는것과 같은 물건을 팔면 《란전》이라고 하며 그 물건을 빼앗고 관가에 고발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지어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팔아도 《란전》이라는 《죄》명을 들씌워 그 물건을 략탈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어용상인으로서의 특권은 1791년(정조 15년)에 국가가 일반시전인들의 어용적특권의 페지를 선포한 이른바 《신해통공》이후에도 계속되였다.

륙주비전상인들은 인민들을 기만하여 착취하였으며 국가로부터 상업적특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통치계급의 리익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그들은 봉건왕정에서 자주 벌린 여러가지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은 물론 대동법실시이후에는 급격히 늘어난 정부의 각 관청들에서 요구하는 여러가지 물품들을 제때에 마련하여 헐값으로 납부할 의무를 지니고있었으며 규정된 세를 정부에 내야 하였다.

이렇게 봉건통치배들은 어용상인들을 끼고 시전을 통하여 저들의 리속을 추구하였고 시전의 일반상인들과 백성들은 2중3중의 착취를 당하였다.

봉건사회말기 상품화페관계의 발전과 상업자본의 장성에 따라 류통부문에서 륙주비전을 비롯한 한성시전들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였으며 륙주비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페지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