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자식들을 대신하여 로인님들을 모시겠다고 하시며

 2024.8.1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오태희로인님일가는 모두가 조국광복을 위한 성전에 한목숨바쳐 싸운 훌륭한 일가입니다.》

오태희일가는 조국해방을 위하여 혁명에 나섰던 4명의 아들들과 딸, 그리고 6명의 조카들을 포함하여 17명이나 되는 일가친척들이 나라와 혁명을 위하여 몸바쳐 싸우다가 원쑤놈들에게 희생된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문이다.

자손들을 혁명에 바친 오태희일가에 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랑과 보살피심은 항일혁명투쟁시기에는 물론 조국해방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였다.

오씨일가를 항상 마음속에 안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이 해방된 후 몸소 오씨일가를 찾아주시였다.

주체37(1948)년 3월 18일 오씨일가가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택의 앞마당에 나오시여 기다려 맞아주시였다.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이 바쁘다나니 로인님들 생각은 늘 하면서도 미처 살피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오늘 로인님들을 만나고보니 함께 싸우던 자제분들의 생각이 간절하다고 하시며 오태희로인님일가는 모두가 조국해방을 위한 성전에 한목숨 바쳐싸운 훌륭한 일가이라고, 로인님들의 아들들은 다 조국해방을 위하여 영용하게 싸우다가 희생된 참된 혁명가들이였다고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이때 오태희로인이 수령님께 그런 생각으로 너무 상심마시라고, 나는 내가 낳아서 키운 몇자식을 나라에 바친 대신에 우리 인민이 낳은 수천수만의 훌륭한 아들딸자식들을 얻었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니 감사하다고 하시며 이제부터는 자신께서 먼저 간 자제분들을 대신하여 로인님들을 모시려고 한다는 심중의 말씀을 하시였다. 계속하시여 로인님들은 자신과 가까이에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집문제까지 미처 생각지 못해 얼른 대답을 드리지 못하는 오태희로인에게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하자고, 그러면 자신의 집가까이에 집을 한채 마련해보겠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로인은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이국땅에서 김일성장군님을 그리워하던 생각을 하면 어찌 그이와 가까이 있고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로인은 그렇게 되면 정사에 바쁘신 수령님께 근심걱정을 끼칠것 같고 또 자식들이 다하지 못한 몫까지 담당하여 일해야겠다는 생각과 자기의 근본이 농민인것만큼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의향을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번 권고하시다가 로인이 거듭 농촌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리자 할수 없으시여 소원이 정 그렇다면 만경대가까이에 집을 마련해드리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며칠후 오씨일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시내에서 좀 떨어진 농촌에 직접 나가시여 마련해주신 집에 보금자리를 잡고 그이의 극진한 보살피심속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을 잡아주시는데만 그치지 않으시고 그후에도 그들의 집을 찾으시고 살림살이에 불편이 없도록 무엇이나 다 마련해주시였다.

오태희로인이 70고령에 이른 주체39(1950)년 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씨일가를 평양으로 이사시켜 생활하도록 하시였다.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후퇴길에 오른 오씨일가를 걱정하시며 인민군군관에게 친히 쌀 1가마니를 지워보내시였으며 전쟁이 끝난지 네번째 되는 봄에는 또다시 오태희로인과 그의 일가들을 평양으로 불러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하기에 오태희로인은 자손들에게 너희들은 아버지들의 뜻을 이은 자식답게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한 전사가 되여야 한다고 당부하군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