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구려의 금속공예발전에 대한 경제사적론증

 2015.4.21.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고구려는 B. C. 277년부터 A. D. 668년까지 존속하면서 오랜 기간의 반침략투쟁에서 나라의 존엄과 영예를 빛내였으며 그 과정에 고구려사람들은 슬기롭고 용맹한 기질과 강한 성격, 굴할줄 모르는 의지를 지니게 되였다. 특히 그들은 조국방위를 위하여 충성다하는것을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였기때문에 높은 민족적긍지와 웅건한 기상을 가질수 있었으며 패기있고 호탕하면서도 진취적인 생활기풍을 소유할수 있었다. 고구려사람들의 이러한 고유한 성격적특질은 고구려문화에 그대로 반영되였으며 그것은 금속공예발전의 우수성을 규정한 주요요인으로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는 넓은 령토와 발전된 문화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으며 고구려인민들은 매우 용감하고 애국심이 강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강대성과 높은 문화수준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랑입니다.》 (《김정일선집》제1권 34페지)

공예는 그 재료와 형상기술상 특성으로 하여 해당 시기 경제와 문화, 기술의 발전정도에 많이 의존한다.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우수성은 우선 발전된 경제와 문화, 과학기술의 토대우에서 이루어진것이다.

고구려에서는 농업과 집짐승기르기 및 사냥, 수공업과 과학기술이 일찍부터 발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여러가지 공예재료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마련되고 선진적인 공예적기법들도 창조되였다. 그리하여 금, 은, 동, 철 등 다양한 금속공예제품들이 예술적으로 훌륭히 제작되였다.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우수성은 또한 당시의 문화예술 특히 여러가지 형태의 미술과 밀접한 련관속에서 발전한것이다. 고구려사람들의 생활이 잘 반영되여있는 무덤벽화, 안학궁, 정릉사, 평양성, 대성산성, 대동강다리와 같은 규모가 방대하고 웅장한 궁전, 절간, 산성, 교량의 건축, 그에 따르는 장식미술, 불상을 비롯한 조각과 여러가지 조각적기법 등의 발전은 당시 세계적수준에 있었으며 고구려미술의 높은 발전정형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으며 공예의 조형예술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데 이바지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이 금속공예를 발전시키고 빛낼수 있은것은 발전된 경제와 과학기술, 예술의 안받침과 함께 고조선의 금속공예를 계승하여 자기의 생활감정과 기호에 맞는 금속공예를 창조발전시키려는 재능과 기개를 훌륭히 발휘하였기때문이다. 창조적인 로동으로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려는 고구려인민들의 지혜와 재능이야말로 우리 나라 중세금속공예발전의 귀중한 밑천으로 되였다.

고구려의 금속공예발전은 이러저러한 종교적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 이룩되였다.

금속공예는 해당 시기의 지배적인 사상, 종교 등과 련관을 가지고 발전하기도 하고 억제되기도 한다. 고구려사람들은 소박한 유물론적인 《기》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있었으며 《하늘신》, 《조상신》, 《자연신》숭배와 같은 토착종교와 불교, 유교 등의 외래종교 그밖에 음양오행, 신선사상 등을 믿고있었다. 그가운데서도 4세기말부터 국가종교로 된 불교의 영향력이 컸다.

봉건통치배들은 조형예술을 불교교리나 불교전설의 선전수단으로 리용하였으며 불교경전에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내용, 일정하게 도식화된 불교문화의 범위안에서 조각, 건축, 그림과 함께 금속공예품을 제작할것을 장공인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공예품의 일부 종류와 장식무늬는 불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였다.

불교는 장공인들의 창발성을 억제하고 전통적인 민족공예의 건전하고도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였다. 그러나 슬기롭고 재능있는 고구려인민들은 종교적인 제약속에서도 창조적활동을 벌리면서 훌륭한 금속공예품들을 수많이 제작하였다.

고구려의 금속공예는 일련의 시대적,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으나 거기에는 고구려인민대중의 슬기로운 지혜와 기상, 뛰여난 재능과 기술, 열렬한 애국심이 스며있다.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중요특징은 첫째로, 금속공예가 우리 인민의 주되는 성격상특질, 정서와 취미를 강하게 반영하면서 발전한것이다.

고구려금속공예품에는 고구려사람들의 용감하고 강인하며 진취적이고 락천적인 성격상특질과 그들의 부드럽고 유순하며 활달한 감정과 정서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여있다. 고구려사람들은 자기들의 그러한 성격, 감정과 정서에 어울리는 금속공예의 형태, 장식무늬, 장식도안 등을 구상하고 탐구하여 금속공예기술을 발전시켜나갔다. 고구려사람들의 이러한 성격과 정서는 우리 인민의 주되는 성격과 감정의 하나를 이룬다. 고구려사람들의 성격과 정서는 오랜 기간의 반침략애국투쟁과정에서 그리고 자연을 정복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창조적인 로동과정에서 굳어진 성격과 정서였으므로 매우 공고한것이였다.

물론 백제, 신라의 금속공예품들에도 그러한 성격과 정서가 여러모로 표현되여있으나 고구려금속공예만큼 그것이 직선적으로 명확하게 반영되여있지는 못하였다.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중요특징은 둘째로,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기원이 오래고 그것이 백제, 신라의 금속공예발전의 토대로 되였으며 당시 금속공예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백제, 신라금속공예품의 대부분의 종류와 형태, 무늬장식이 고구려금속공예에 바탕을 두고있는데서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이것은 3~5세기에 이르는 기간 백제, 신라에서 고구려의 사회정치제도, 과학기술뿐아니라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쓴 결과이다.

고구려사람들은 자기의 선진문화, 금속공예를 동족의 나라에 보급하는데서도 넓은 도량을 보였으며 그것을 같은 겨레로서 응당한 일로 여겼다. 백제, 신라에서 5세기 특히 6세기이후 자기의 개성적인 금속공예품들을 적지 않게 제작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고구려의 금속공예성과들을 토대로 하였기때문이다.

고구려금속공예발전의 중요특징은 셋째로, 고구려금속공예가 다종다양하게 발전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은것이다. 이것은 주로 뚫음무늬수법, 칠보수법, 도금수법, 선새김수법을 비롯한 여러가지 공예적수법이 능란하게 활용되고 장공인들이 의도하는 장식무늬들이 자유롭게 구사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또한 한 품종의 금속공예품을 제조함에 있어서도 수십가지의 형태무늬들을 예술적으로 훌륭히 제작하였으며 주제무늬에서도 실제동물이나 식물로부터 환상적인 동식물 및 괴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표현한데서 알수 있다.

고구려의 금속공예발전의 토대는 비록 수공업적기술이지만 귀금속공예와 금동 및 청동제품제작이 성행하고 그 제작기술도 비상히 발전한것과 관련된다.

무엇보다도 고구려에서는 금, 은, 동을 비롯한 귀금속생산과 가공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할수 없는 높은 수준에 있었다.

여러가지 력사자료들은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금은보화가 많았고 수공업도 발전하였으며 금속공예가 다각적으로 발전하고있던 사실을 전하고있다.

B. C. 249년에 선비족을 정복하는데서 공로를 세운 부분노에게 황금 30근을 주어 표창한 사실*1이라든가 18년에 물에 빠져죽은 왕자의 주검을 찾아준 제수에게 금 10근을 주어 표창하였던 사실*2 그리고 430년대에 당시 중국의 후위에 사신을 파견할 때 황금 200근과 백은 400근을 보내여 무역을 진행한 사실*3, 605년에 일본에 장륙불상주조용으로 황금 300량을 희사한 사실*4들을 통하여 고구려는 금, 은채취와 제련기술이 발전하고 금, 은, 동을 풍부하게 가진 부유한 나라였으며 그것으로 각종 일용품과 사치품도 많이 만들고있었다는것을 능히 알수 있다.

  • *1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 류리명왕 11년
  • *2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 류리명왕 37년
  • *3 《위서》권100 고구려전
  • *4 《일본서기》권22 추고기 13년

고구려사람들이 금, 은을 많이 썼기때문에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력사책들에도 고구려사람들이 금은제품을 좋아하며 금은으로 관모를 장식하고 단추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금, 은, 동으로 만든 귀중품, 공예사치품들을 대대로 물려주거나 껴묻거리로 무덤에 묻었다. 그들은 주검을 정중히 대하고 성의껏 장례를 치르는 후장풍습을 지켰으며 그에 따라 지배층들은 금은보화를 아끼지 않고 그것을 주검과 함께 땅속에 묻었다. 이것은 물론 죽은 다음에도 살아있을 때와 같이 호강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념원에서 진행한 미신적행위였으나 어쨌든 당시 다른 나라의 왕이나 귀족들의 경우와 같이 묻힌자가 평시에 애용하던 진귀한 생활용품, 공예품들을 함께 묻은것이였다. 따라서 고구려왕이나 귀족, 지방호족들의 무덤속에 그러한 재물이 가득차있었을것이라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우기 무덤들에 그토록 현실생활을 방불케하는 여러가지 그림들을 그려 묻힌자의 《영원한 안녕》을 바라던 고구려사람들이였으므로 《래세》에 가서도 호강하고 화려한 《생활》을 영위할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지니고있던 여러가지 진귀한 장식품들을 껴묻거리로 묻었을것이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 고구려의 귀금속공예품으로 남아있는것은 관모와 금으로 만든 귀걸이, 반지, 관자, 비녀, 단추, 은으로 만든 반지, 비녀 등이다. 이밖에도 력사자료들에는 금관, 여러가지 금장식품 등이 보인다. 고구려의 귀금속공예품은 형태와 장식이 복잡하지 않고 소박하고 간결하면서도 듬직한 조형적풍격을 가지고있는것이 특징이다.

고구려귀금속공예품가운데서 볼만 한것은 관모와 금귀걸이다.

고구려귀족들은 관모에 금이나 은으로 만든 꽃장식을 하여 푸른 옥까지 달았으며 수놓은 비단옷에 금단추까지 달면서 옷차림을 화려하게 꾸몄다.

고구려관모의 한 형식으로 볼수 있는것이 집안의 고구려돌칸흙무덤에서 2개가 나왔다. 고구려관모의 특징적인 형태는 가운데에 길죽한 장식이 서있고 그 량쪽에 새날개모양의 깃이 뒤로 약간 퍼져있는것이다. 가운데장식은 가장자리를 날개털모양으로 만든것인데 거기에는 3줄의 보요가 달려있다. 그리고 새날개모양의 깃에도 보요가 달려있다.

고구려의 이러한 새깃모양관모는 원래 고깔모양의 절풍에서 유래한것이다. 고구려의 신분이 높은 계층들은 새깃을 2개 꽂거나 새꽁지 같은것을 한뭉치 꽂았다. 쌍기둥무덤의 안길 서벽그림의 남자는 비단같은것으로 만든 고깔모양의 관모를 썼는데 그것은 새깃 2개를 꽂은것이며 춤무덤벽화의 사냥장면에 등장하는 활쏘는 인물은 고깔모양의 관모에 새꼬리 같은것을 한뭉치 꽂은것이다. 처음에 새깃을 꽂던것이 점차 장식성이 높아지면서 절풍에 금, 은, 동으로 만든 새깃모양을 꽂는데까지 이르렀던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관모에서 독특한것은 중심물체가 절풍모양이라는것과 그 량쪽에 새깃모양장식이 있는것인데 여기서 주목되는것은 그러한 형식이 백제나 신라 및 가야관모의 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사실이다.

관모밖에 고구려귀금속공예품으로서 수량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금귀걸이다. 금귀걸이는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들이 저들의 특권적지위, 부귀영화와 권세를 내세우기 위한 장식품으로 리용되였다.

고구려의 금귀걸이들은 종류와 형태, 장식이 다양하고 조형적으로 특이하고 맵시가 있으며 그 제작기술이 매우 세련되여있다. 이것은 금귀걸이들이 당시 고구려근로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예술적재능의 산물이였기때문이다.

고구려귀걸이의 특징은 첫째로, 가는 고리형귀걸이가 기본을 이루고있는것이다.

고구려귀걸이는 귀에 거는 맨 웃부분의 고리의 생김새에 따라 크게 굵은고리형귀걸이와 가는고리형귀걸이로 나누어볼수 있다. 굵은고리형귀걸이나 가는고리형귀걸이의 기본형식은 다같이 얇은 순금판을 오려 꽃바구니모양의 장식물을 만들고 그밑에 살구잎모양의 드림장식을 매단것이다.

평양일대에서 나온 고조선유민들이 남긴 귀걸이를 보아도 그렇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보아도 굵은고리형귀걸이보다 가는고리형귀걸이가 앞선 시기의것으로 인정되며 귀걸이가 널리 쓰이고 장식적효과가 커짐에 따라 가는고리형귀걸이가 굵은고리형귀걸이로 발전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지금까지 가는고리형귀걸이가 많이 발굴된것으로 보아 고구려귀족들이 이 형식의 귀걸이를 더 즐겨썼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고구려귀걸이의 특징은 둘째로, 굵고가는 고리, 길고짧은 여러가지 형식의 중간장식과 드림장식들이 서로 어울리게 결합되여있는것이다.

고구려귀걸이는 예술적으로 고상한 미감을 자아내는데 이것은 귀걸이의 구조양식에서 고리와 중간 및 드림장식이 섬세하거나 특별히 정교로운데서 오는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비록 간소하게 생겼어도 변화있고 조화롭게 서로 결합되여 균형이 잡혀있기때문이다.

굵은고리형귀걸이의 달린장식만 보아도 가운데를 납작하게 하고 우는 타원형 또는 원형으로, 밑은 원추형의 그물추와 비슷한것으로서 모두 하나로 주물한것도 있고 꽃바구니모양장식에 대추잎모양장식을 달아맨것도 있다.

가는고리형귀걸이의 꽃바구니, 살구잎장식들도 변화있게 처리되였다. 즉 꽃바구니모양을 여러개의 작은 둥근 고리로 형상한것, 닭알모양의 몸체 네곳에 둥근 고리로 원형창문처럼 형상한것 등이 있고 살구잎모양장식도 한개 달린것, 가운데 큰것을 달고 량옆에 보다 작은것을 달아 움직이면 서로 부딪쳐 소리나게 한것 등 여러가지이다. 또한 꽃바구니모양장식이 없이 가느다란 큰 고리에 작은 고리를 몇개씩 달고 거기에 살구잎모양장식을 달아놓은것도 있다.

이처럼 귀걸이의 중간장식, 드림장식들의 변화있는 구성, 고리와 중간 및 드림장식의 배합으로 하여 귀걸이는 전반적으로 형태상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명쾌한 정서를 잘 나타내고있다.

고구려의 금속공예유물가운데서 수량상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금동 및 청동공예품과 그 장식품들이다.

고구려 금동 및 청동공예의 주되는 특징은 첫째로, 어느 공예보다도 이 공예품에 고구려사람들의 성격적특질과 예술적기교가 뚜렷이 표현되여있는것이다. 다시말하여 금동 및 청동공예품들에는 고구려사람들의 패기있고 약동적인 기상과 온건하고 락천적인 성품, 정교로운 솜씨를 비롯한 섬세한 예술적기교가 잘 반영되여있다.

고구려 금동 및 청동공예의 주되는 특징은 둘째로, 풍만하고 여유작작한 느낌을 주는 형태미, 끊임없이 약동하는 선조미, 기운차게 흐르는 률동미, 미묘한 색조미 등으로 통일되여있는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전형적인 불꽃, 구름무늬 같은것은 매우 힘차고 약동적이다. 세찬 기백과 끓어넘치는 박력은 금속장식무늬를 비롯한 고구려예술에 일관하게 흐르는 숨결이며 독특한 풍격이다.

고구려 금동 및 청동공예의 주되는 특징은 셋째로, 전반적인 륜곽과 세부장식에 부드럽고 우아한 고구려인민들의 예술적감정과 취미가 뚜렷이 표현되여있는것이다.

고구려의 금동 및 청동공예품으로 전해오는것으로는 손잡이붙은 향로(금동), 초두(청동), 신발(금동, 청동), 호우(청동), 팔찌(청동) 등이 있다. 이러한 공예품들은 고구려의 뚫음무늬장식품과는 달리 그 형태가 비교적 소박하고 장식이 간소하며 수법이 간결하다.

일본 나라현 법륭사에 있는 손잡이붙은 향로는 고구려금속공예품의 가장 우수한것의 하나로서 현존 손잡이붙은 향로가운데서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것이다. *

  • * 《일본미술전사》상권 비쮸쯔출판사, 1959년, 145페지, 《대일본백과사전》20권 쇼가꾸관, 1974년, 139페지

이 향로는 불교행사때 중들이 향불을 피우던 화로인데 총길이는 약 39. 4㎝, 높이는 10. 1㎝, 아구리직경은 13. 5㎝이다. 그 생김새를 보면 맨밑에 2중으로 된 꽃잎모양의 받침대가 있고 그우에 화로몸체가 놓여있는데 화로의 전이 특별히 큰것이 눈에 뜨인다. 전에는 길이 26. 3㎝의 손자루가 달려있는데 자루앞부분에는 반원형의 큰 장식이 2개 있고 자루 맨끝은 3가닥으로 벌어졌다. 3가닥으로 벌어진 끝모양이 마치 까치꼬리를 닮았다 하여 오래전부터 이 향로를 까치꼬리향로라고도 불러왔다. 화로에 이렇다 할 특별한 장식은 없으나 형태가 독특하고 제작솜씨 또한 매우 간결하다. 쓸모에 편리하게 자루끝이 예술적으로 잘 처리되였다.

이 향로에서 주목되는것은 손자루뒤면에 옻으로 《혜자□□(慧慈□□)》라고 씌여있는것인데 혜자는 595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된 고구려의 이름있는 중이였다. 이 금동화로는 혜자를 통하여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달되여 성덕태자의 《보물》의 하나로 되였으며 그와 밀접한 련관이 있던 법륭사의 보물로 오늘까지 전해내려온것이다.

청동이나 금동으로 만든 신발은 공예적수법으로 제작된 몸치레거리의 하나였다. 금동신바닥에는 전면에 길죽한 징이 박혀있는데 이러한 금동신은 고구려무덤벽화들에도 보인다. 세칸무덤(4세기말~5세기초)의 두번째칸 서쪽벽에는 긴 갑옷바지를 입고 칼을 허리에 찬 무사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의 신은 징을 박은것이다. 벽화의 그림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군인의 일정한 계층들속에서는 징이 박힌 금동 또는 청동신을 신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구려의 금동, 청동공예의 독특한 모습은 뚫음무늬장식품들에도 잘 나타나있다.

고구려에서 뚫음무늬수법이 발전할수 있은것은 여러가지 금속가공술의 발전과 함께 정을 비롯한 가공도구의 발전이 안받침되여있었기때문이며 고구려사람들이 자기들의 성격과 예술적취미에 맞는 립체적인 무늬, 부드럽고 풍만한 평면적인 무늬를 바로 뚫음무늬수법을 통해서 더 원만히 형상할수 있다는것을 인식하였기때문이다.

고구려의 뚫음무늬금동 및 청동장식품으로는 해모양, 보관형, 광배형, 사각형, 장방형, 탑형, 6,8꽃잎형 등 다양한 형태의것들이 있다. 이 장식품들은 고구려의 정교한 뚫음무늬장식술의 우수성과 고구려사람들의 주되는 성격적특징들을 집약적으로 반영한데 그 예술적의의가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해모양뚫음무늬금동장식품은 그 특이한 형태와 기운찬 장식무늬, 딱장벌레의 나래의 기발한 장식 등으로 하여 중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금속공예장식품의 하나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해모양뚫음무늬금동장식품을 통하여 우리는 고구려사람들의 기발한 공예적수법과 그 우수성을 여러모로 찾아보게 된다.

그것은 우선 무늬들이 립체감을 강하게 안겨주는것이다. 무늬의 립체감을 표현하는 수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으나 고구려장공인들은 뚫으기기법으로 그 효과를 나타냈다. 특히 그들은 립체감을 더 돋구고 표면의 장식적효과를 더 생동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까마귀, 봉황, 룡뿐아니라 매개 무늬의 선마다 지어는 2~3㎜정도의 가는 선에 이르기까지 그 표면량쪽에 가는 홈을 파고 홈의 바깥쪽이 안쪽보다 낮아보이게 함으로써 모든 무늬의 선들이 예리하면서도 둥글둥글해보이게 하였다. 이렇듯 장식판의 평면감을 극복하였으며 둥근맛이 나는 굵고가는 금동선으로 무늬를 이룬것같이 보이게 함으로써 립체감을 돋구었다. 뿐만아니라 무늬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거침없이 쭉쭉 뻗어올라가는것처럼 률동적이다. 이것은 고구려사람들의 활동적이며 진취적인 기상, 우아한 성품을 그대로 담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다음으로 그것은 뚫음무늬장식품에 민족공예의 고유한 장식인 딱장벌레(길정충 또는 옥충)의 나래장식을 도입한것이다.

장식품의 테두리뒤부분에 돌아가면서 딱장벌레의 나래를 깔았는데 나래딱지는 윤택있는 금록색 및 진록색 바탕중심에 세로 자홍색의 가는 줄이 두줄 나타나있다. 이러한 나래장식은 뚫음무늬금속공예품을 더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고심끝에 착상해낸것이다.

금동뚫음무늬장식품의 황금색과 금록색속의 자홍색의 잔줄이 있는 딱장벌레나래의 현혹적인 색은 참으로 조화로우면서도 호화로운 장식적효과를 내고있다.

해모양뚫음무늬금동장식품과 함께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토성에서 나온 금동보관형뚫음무늬장식품도 고구려의 우수한 공예술을 잘 보여준다.

물결처럼 된 테두리는 아래우로 구분되여있는데 밑대에는 구슬무늬를 뚫러새기고 웃대와 밑대사이에는 7개의 꽃잎장식을, 그 사이사이에는 인동무늬를 형상한것이다. 그리고 밑대아래 량켠에는 옷고름모양의 드림장식이 길게 늘어져있다.

이 장식품에서 특징적인것은 불꽃의 실감을 돋구고 립체감을 부여하기 위하여 해모양뚫음무늬금동장식품의 무늬장식과는 달리 9줄의 불꽃무늬장식중 두곳에 앞뒤 2중으로 장식을 세웠으며 불꽃무늬자체를 활활 타오르는 불길마냥 쭉쭉 힘있게 내뻗게 한것이다. 그리고 무늬끝이 비틀어 꼬이게 하였으며 모든 무늬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점선무늬를 주어 움직이는듯 한 효과를 내게 하였다.

평양시 평천구역에서 드러난 인왕상뚫음무늬장식품(가로4. 5㎝, 세로6. 3㎝)은 고구려의 독특한 무늬도안을 보여준다.

이 장식품에서 주목되는것은 인왕상과 그 머리우에 새겨진 나무잎들의 구도가 빈틈없이 째여져있는것이며 고구려사람들이 즐긴 나무의 형상도안을 잘 보여주는것이다. 두 인왕상머리우에 뚫어새긴 5개의 큰 잎을 가진 나무의 형태는 평양시 청류벽에서 나온 얇은 금동판으로 큰 소나무를 형상한 소나무모양금동장식의 나무도안과 평양시 력포구역 진파리 9호무덤벽화, 집안다섯무덤의 4호, 5호무덤벽화,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무덤 안칸서쪽벽의 나무그림과 신통히도 같으며 표현수법도 같다. 이 유물을 통해서도 고구려공예가 고구려의 회화, 조각 등과 밀접히 련관되여 발전하였다는것을 짐작할수 있다.

고구려금동뚫음무늬장식품에는 또한 6꽃잎 및 8꽃잎모양의 장식품이 많다. 이러한 장식품들의 예술적특징은 도안이 째이고 매우 조화롭고 아름다운것이다.

우에서 본 고구려의 금동뚫음무늬장식품들은 전반적으로 그 생김새가 화려한 편이며 뚫음무늬 구도 역시 빈틈이 없는 우수한 공예장식품이다.

고구려의 금속장식품들을 공예기술면에서 볼 때 그것은 단조, 주조, 야금, 오목새김, 뚫음새김, 선새김, 도금 등 여러가지 기법으로 만든것인데 특히 주목되는것은 칠보공예술이 활용된 사실이다.

칠보란 보통 금, 은, 유리, 진주, 마노와 같은 7가지의 진귀한 금속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물건들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금속공예에서 칠보기법이란 금속산화물에 연한 유리질용액을 섞은 유약을 씌워 광택을 내는 장식법을 말한다.

칠보공예품은 그 유물이 매우 희귀하여 삼국시기의 유물로는 불과 몇점밖에 안되며 고대시기 유적에서는 아직 드러난 일이 없다.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던 금강사터에서는 직경 4㎝정도의 꽃모양칠보장식금구가 나왔는데* 이것은 5세기경에 고구려에서 칠보장식기법이 보급되고있었던 사실을 확증하여준다.

  • * 《조선고문화종감》4권 요도꾸사, 1961년, 22~23페지

칠보장식금구는 다섯꽃잎을 안팎으로 형상한것인데 안팎꽃잎부분에는 풀색이 도는 유리를 부어넣어 특이한 색채적변화와 미감을 나타내고있다.

고구려사람들은 딱장벌레의 나래를 도입하여 뚫음무늬금구의 장식수법을 창조하였으며 칠보장식을 적극 받아들여 주조공예장식으로서는 더없이 미묘한 수법도 개척하였다.

다음으로 고구려에서는 고대 제철기술을 이어받아 철을 많이 생산하여 여러가지 철재도구들을 많이 생산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공예적수법에 의하여 예술적으로 우수하게 제작된 칼, 투구, 갑옷, 명기, 거울 등을 들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칼로서는 긴칼과 짧은칼이 있는데 공예적으로 볼 때 칼몸의 예리한 선조미, 상어가죽으로 장식한 칼자루의 세공도 볼만 하지만 둥근 고리형태로 된 칼자루끝은 더 훌륭하다.

고구려의 고리자루긴칼의 고리가운데는 고리안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민고리와 함께 고리안에 세잎사귀(인동)모양을 부각한 세잎고리가 있다. 특히 고구려에서 고리자루긴칼의 칼집과 칼자루를 은으로 장식하고 고리도 은으로 만든 은고리자루긴칼이 제작되고 해외에도 나간 사실은 고구려의 철공예술의 발전정형을 잘 알수 있게 한다.

고구려의 갑옷, 투구, 방패, 말투구와 말갑옷 등 방어무장들도 당시 철공예술의 발전수준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갑옷은 주로 쇠로 만든 수많은 패쪽을 꿰매서 만든것인데 패쪽 하나하나에는 네 모서리마다에 쇠줄이나 가죽끈으로 꿰맬수 있게 구멍이 뚫려있다. 그러므로 쇠갑옷을 입어도 자유자재로 움직일수 있게 되여있다. 당시 최고지휘관급에 속한 인물들은 패쪽에 도금을 한 금갑을 입었다.

고구려사람들은 말에도 마면갑을 씌우고 마갑을 입혔다. 마면갑은 말대가리의 생김새에 맞게 철판으로 만든것이고 마갑은 쇠패쪽을 이어 만든것이거나 가죽으로 만든것이다.

수많은 군사인원과 말에 갑옷과 투구를 입힌 사실은 헤아릴수 없이 많은 쇠패쪽을 전제로 한것인데 그 패쪽들은 모두 공예적수법으로 만든것이다. 당시 그 많은 패쪽을 만들수 있은것은 고구려의 제철업, 제강기술의 발전과 함께 주물, 단조, 도금 등 금속가공기술과 공예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또한 고구려에서 무기무장이 발전하고 칼, 갑옷, 투구 등을 잘 만든것은 고구려사람들이 력대로 외적과의 부단한 투쟁속에서 생활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평안북도 운산군 룡호리1호무덤에서 나온 철로 만든 부뚜막모형도 고구려철공예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한다. 고국원왕릉 부엌그림의 부뚜막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이 철제부뚜막은 한쪽에 아궁이가 있고 그우에 솥을 놓을 자리가 있으며 다른쪽에 굴뚝이 설치되여있는것이다. 전반적인 모양은 간소하면서도 굳건한 맛을 준다. 길이가 약 70㎝나 되는것으로 보아 단순한 명기로 보기에는 좀 지나치게 크며 아마도 실지 부엌세간으로 쓰인 부뚜막이였으리라고 인정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금속공예발전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만방에 떨치고 고구려의 위용을 빛내이는데 크게 이바지한 중요요인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