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이불속에 감추어두었던 사진

 2022.12.2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생전에 조선혁명박물관을 자주 찾으시였다.

노래에도 있는것처럼 추억은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는 생의 메아리여서 각별히 소중한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 그처럼 숭고한 덕성과 의리를 지니시고 혁명전사들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 보살펴주시기에 조선의 참다운 공산주의자들과 뜻있는 사람들은 벌써 우리 혁명의 려명기부터 수령님을 높이 우러러모시고 따랐으며 끝없이 흠모하였습니다.》 (김정일전집》 제33권 369페지)

하지만 세기와 더불어 준엄한 혁명의 멀고먼 길을 걸어오신 우리 수령님에게 있어서 흘러간 지난 날들은 더더욱 잊을수 없이 귀중한것이였다.

그 나날들에는 아끼고 사랑하던 혁명동지들을 잃은 가슴아픈 일도 있었고 인민의 한없는 총애속에 인민의 아들로 투쟁하여오신 긍지높은 나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혁명박물관을 자주 찾으시여서는 가장 간고했던, 가장 보람찼던 혁명투쟁시기를 더듬어보시며 그렇게도 보고싶은 잊을수 없는 전우들의 모습을 잠시나마 사랑의 한품에 다시 안아보군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혁명박물관을 마지막으로 찾으신것은 주체82(1993)년 7월이였다.

더위에 시달리듯 구름마저 허덕이며 뿌연 얼굴을 드리운 하늘에서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확확 내뿜던 어느날, 한여름의 무더위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초기혁명활동시기의 투쟁력사를 보여주는 관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벽에 걸어놓은 사진들과 진렬장들을 보시며 걸음을 옮기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생모를 쓰시고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으신 길림시절의 자신의 사진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였다.

사진을 바라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눈가에 그이의 생애에서 그토록 진한 자욱을 남긴 길림시절에 대한 추억이 한가득 실리였다.

길림시절, 그 시절은 위대한 수령님의 청년운동시절로써 한생에서 잊을수 없는 시절이였다.

그 나날은 승리를 기약할수 없는 혁명의 초입구였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탐구의 나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림시절에 맑스-레닌주의를 과학적학설로써 리해하시였으며 열혈의 혈기를 지니시고 청년학생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혁명력량으로 묶어세워나가시였다.

참으로 우리 수령님의 일생에서 길림시절은 청년운동의 전성기로서 혁명적세계관이 확립되고 드팀없는것으로 굳어진 시절이였으며 인민행렬차에 오른 잊을수 없는 시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그 벅찬 길림시절, 아득히 흘러간 옛시절의 숨결을 다시금 불러오게 하는 사진인것으로 하여 눈길을 떼지 않으신채 채주선이 보관하고있던 사진이라고, 자신께서 유년시절에 찍은 사진이 몇장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탄압으로 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버렸다고 하시였다.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사진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채주선은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나의 사진한장을 이불속에 감추어두었다가 해방후에 내놓았다고 뜨거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10대의 그 나이에 벌써 우리 수령님의 인간상이 얼마나 위대하였으면 이 나라의 이름없는 평범한 녀성이 그이를 조선혁명의 태양으로 굳게 믿고 일제의 그 모진 박해와 감시, 생활의 세파속에서 수령님의 사진을 30여년동안 고이 간직해올수 있었겠는가.

사실 그 사진으로 말하면 강반석어머님께서 무송에 계실 때 혁명사업을 하시느라 늘 나다니시는 아드님이 그리우실적마다 꺼내보시군 하시던 사진이였다.

그러시던것을 위대한 수령님과 강반석어머님의 각별한 사랑과 세심한 지도를 받으며 혁명사업을 하던 채주선동지가 결혼한 후 시가를 따라 다영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어머님께서 기념으로 주신 사진이였다.

어머님께서는 친딸처럼 사랑해주시며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시던 그가 곁을 떠나기 너무도 서러워 큰절을 올리고 일어서려다 말고 어푸러져 울고있는것을 보시고 마음이 좋지 않으시여 그의 잔등을 한동안 어루만지시다가 의농문을 여시고 소중히 보관하고계시던 그 사진을 꺼내주시였던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디에 가서도 위대한 수령님을 마음의 기둥으로 굳게 믿고 혁명사업을 잘하라는 어머님의 크나큰 기대가 담겨져있었다.

그리하여 채주선동지는 자기의 일생에서 가장 보람찼던 그 시절을 잊을수 없어 일제의 폭압으로 집을 자주 옮겨야 했던 어려운 속에서도 그 사진만은 이불속에 소중히 감추어두고 목숨으로 지켜왔으며 위대한 수령님이 그리울 때마다 남몰래 이불을 뜯고 사진을 꺼내보군 하면서 해방될 날을 철석같이 믿으며 꿋꿋이 살아왔던것이다.

그것은 실로 참다운 인간을 따르는 길에 정의가 있다고 확신한 인간만이 할수 있는 의로운 일이였으며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뛰여다니던 그 시절을 한생의 가장 값높은 시절로 간주하는 혁명가만이 할수 있는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였다.

천만금의 재부와도 바꿀수 없는 위대한 수령님의 10대의 모습을 우리 인민과 인류가 알도록 하여준 채주선동지의 공적은 그가 우리 혁명앞에 세운 공적중에 가장 큰 공적으로 된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10대의 청춘시절의 모습은 우리 수령님을 잊지 못해하는 채주선동지만이 아닌 이 나라 인민들의 뜨거운 마음에 떠받들리여 력사에 길이 남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