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발해의 《검은돈길》

 2016.5.1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181페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8세기에 벌써 동방의 강국으로 등장하여 자기의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며 강력한 국력, 발전된 경제력에 토대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당나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관계를 발전시켰다.

중세 다른 나라들과의 많은 무역교류를 진행한 무역로의 하나인 《비단길》이 있었다는데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있지만 북쪽무역로의 하나인 《검은돈길》이 있었다는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한 《검은돈길》이 바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의 《검은돈길》이다. 발해의 검은돈털가죽제품이 북쪽무역로를 통하여 서역에까지 전해졌기때문에 《검은돈길》이라고 한다.

발해의 《검은돈길》은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관계를 통하여 개척되게 되였으며 알려지게 되였다.

당시 발해는 당나라의 등주도독부 남쪽지역에 설치되여있던 발해관을 통하여 무역관계를 발전시켰다. 이때 발해의 특산물인 곤포,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룡주의 명주, 위성의 철, 로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락유의 배 등과 함께 검은돈을 비롯한 많은 털가죽제품이 수출되였다.

《검은돈길》을 통하여 서역에까지 수출된 털가죽제품이 일본에도 수출되였는데 871년 5월 자기 나라 왕을 대신하여 발해사신 양성규에게 감사장을 써준 일본의 한 관리는 발해의 돈털가죽옷과 사향, 검은빛털가죽신발을 《얻기 힘든 이역의 물건》으로 높이 추어올렸다.

당시 일본의 귀족관료들속에서는 발해의 털가죽제품을 숭상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였다. 발해의 비싼 털가죽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잘사는 사람으로 인정될 정도였다. 자기의 부유함을 자랑하기 위해 한여름 장마철에 발해산 검은돈털가죽옷을 무려 8벌씩이나 껴입고 공식연회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아연케 한 사람도 있었다.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 멀리 서역에까지 《검은돈길》로 돈, 범, 표범, 곰, 흰토끼 등의 털가죽제품들을 많이 수출하였는데 그 인기와 수요가 대단히 높았다.

8세기에 들어와 비단길이 지나간 당나라의 정세가 불안정한것으로 하여 우리 선조들이 일찌기 개척하였던 북방로가 새로운 무역통로로 이름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한 발해의 수출품중에서 손꼽히는것은 검은돈털가죽제품이였다. 이것을 두고 외국력사학계에서는 《비단길보다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지는 더 북쪽, 동부아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가 존재하였다.》고 하면서 1천년동안에 걸쳐 검은돈털가죽제품이 고구려, 발해의 령역으로부터 수출된 가장 중요한 품목이였으므로 이 북방무역로를 《검은돈길》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있다.

이처럼 발해는 강력한 국력에 토대하여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높은 대외적지위를 차지하고 무역을 발전시킴으로써 200여년간 《해동성국》으로서 그 이름을 떨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