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리영희
2023.6.8.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은 위대한 사상리론가, 탁월한 령도자이실뿐아니라 모든 부문의 지식을 환히 꿰들고계시는 박식가이십니다.》 (《김정일전집》 제14권 348페지)
지칠줄 모르는 탐구의 자욱자욱으로 한생을 이어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견줄수 없는 비상한 식견을 지니시고 혁명과 건설을 빛나게 령도하여오신 탁월한 실력가, 박식가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령도의 전기간 풍부한 지식과 해박한 식견으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크고작은 모든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내리시고 결론을 세워 처리해나가시였다.
20리날바다우에 거연히 솟아있는 서해갑문은 세인을 놀래우는 뛰여난 식견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을 보여주는 로동당시대의 많고많은 증견물들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서해갑문이라고 하면 큰물피해방지, 수송문제해결 등 인민경제적의의가 대단히 큰 기념비적건축물이라는데 대해서 누구나 잘 알고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과학적기초우에서 세워졌는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해지구에 대규모의 갑문을 건설하는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1950년대 조국해방전쟁때부터 구상하고계시던 대자연개조사업이였다.
서해갑문건설이 가지는 의의와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80년대에 서해갑문건설을 발기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당시 갑문건설에서 기본초점으로 되는 문제는 갑문을 어느 위치에 건설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갑문건설에서 중요한것은 언제아래에 감탕이 쌓이지 않게 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다른 나라들을 보면 갑문을 건설해놓고도 아래에 감탕이 쌓이기때문에 쓰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갑문을 건설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것은 감탕이 적게 쌓이는곳에 자리를 잡는가 잡지 못하는가 하는데 있다고 하시면서 갑문위치선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일군들과 설계를 담당한 과학자들은 공사량과 비용 등의 견지에서만 새로 세우게 될 서해갑문의 위치를 어디에 정하겠는가를 론의하고있었다.
결국 대부분의 일군들과 학자들은 새로 건설될 서해갑문의 위치를 남포시 동전리로 할것을 주장하고있었다. 그것은 이 구간이 대동강하류치고 강폭이 비교적 좁고 지질상태도 좋아 갑문을 막는 공사량이 적어 건설을 쉽게 할수 있다는것을 타산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70(1981)년 5월 2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일군들과 유능한 수리공학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파도세찬 바다로 나가시였다. 배에 오른 일군들과 학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현지에서 직접 갑문의 위치를 정해주시려 한다는데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항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날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세우게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출렁이는 바다물결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 일군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얼굴들만 마주보고있었다.
잠시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여기가 갑문을 세울 리상적인 위치라고 확신에 넘친 어조로 교시하시였다.
영문도 모르고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나섰다가 그이께서 바다 한가운데에 갑문의 위치로 정해주시는 곳을 들여다보던 일군들과 수리공학자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자막대기를 대고 그어놓은것과도 같이 대동강과 서해바다의 경계가 명확하게 안겨오는 곳이였다. 바다쪽은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고 강쪽은 흘러내리는 퇴적물로 하여 흐려있는것이 누구에게나 확연하게 안겨들었다.
그 경계선을 따라 세운다면 갑문은 틀림없이 끝살뿌리-피도-광량만사이를 련결하는 날바다우의 가장 리상적인 구조물로 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탄을 금치 못해하는 일군들에게 배를 타고가면서 보니 남포시 안쪽에는 물이 흐렸지만 끝살뿌리-피도-광량만쪽에는 물이 맑았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갑문을 건설하면 감탕이 쌓이지 않는다는것을 말하여준다고, 만일 감탕이 쌓이여도 문이 바다와 잇닿아있기때문에 갑문을 열어 감탕을 다 씻어낼수 있을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일반적으로 강어구에 갑문을 건설하면 갑문바깥수역에서 퇴적에 의한 지형변동현상이 일어나며 그것으로 하여 수로운영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올수 있다. 그리하여 억만금을 들여 건설한 갑문을 줴버리거나 아이보다 배꼽이 크다는 격으로 수로준첩에 들이는 비용이 너무 커서 몇십년이 지나도록 갑문건설에 들인 원가조차 뽑지 못하는 실례도 있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갑문을 끝살뿌리-피도-광량만사이에 건설하면 동전리에 건설하는것보다 공사량이 많아지는데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경제적효과성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과 학자들은 과학적인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을 지니시고 망망한 바다까지도 손금보듯 환히 들여다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매혹되여 다시한번 커다란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정해주신 서해갑문의 위치는 말그대로 갑문을 세우기에는 나무랄데 없는 가장 리상적인 명당자리였던것이다.
20리(8㎞)날바다우의 명당자리에 건설된 서해갑문은 오늘도 조선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 커다란 생활력을 발휘하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비범한 식견을 길이 전하는 만년대계의 대기념비적창조물로 거연히 솟아있다.
사진. 만년대계의 기념비적창조물-서해갑문
정녕 위대한 수령님은 그 폭과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수 없을 다방면적인 지식과 뛰여난 안목을 지니시고 혁명과 건설의 모든 문제를 빛나게 해결하여주신 위인중의 위인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