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옷차림을 통하여 본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2018.4.20.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발전시켰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북방 여러 나라들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김정일전집》 제2권 163~164페지)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698년부터 926년까지 근 230년간 존재하면서 나라의 륭성을 이룩함으로써 주변나라들로부터 《해동성국》(동방의 륭성하는 나라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는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분야에서도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계승하였는데 그것은 옷차림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발해시기의 일상옷차림과 관복, 군복차림을 통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에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고구려와 발해사람들의 옷차림의 계승관계는 무엇보다도 일상옷차림에서 찾아볼수 있다.

발해시기에 남자들은 일상옷차림으로 바지, 저고리, 겉옷을 입고 머리쓰개도 썼으며 신을 신었다.

발해시기에 남자의 바지형태는 고구려시기의 남자바지형태 그대로였다.

고구려남자들의 바지에는 품과 가랭이가 적당한 《궁고》와 품과 가랭이가 넓은 《대구고》가 있었는데 이러한 바지형태들은 발해에도 계승되였다.

가랭이가 좁은 바지인 《궁고》는 근로인민들이 일상생활에서뿐아니라 생산활동을 진행할 때에도 입던 옷이였으며 가랭이품이 넓은것으로 하여 걸어다니는데는 물론 생산활동에도 불편하였던 《대구고》는 주로 통치계급들이 입던 옷이였다.

발해 정효공주무덤벽화에 그려진 남자들은 고구려사람들이 입었던 《대구고》와 같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것으로 보인다. 이 남자들은 차림새로 보아 귀족관료층에 속하는 인물들이라고 볼수 있다.

발해시기에 남자들의 저고리도 고구려시기의 남자저고리형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정효공주무덤벽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겉옷속에 속겉옷과 저고리를 입었다.

저고리의 형태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체로 선행한 고구려의것을 계승하여 앞을 터친 곧은깃이였고 길이는 허리아래부분에까지 이르는것이였다고 짐작된다.

중국 력사책《송사》송기전에서는 발해의 보병과 기병들은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고구려사람들이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깃을 여미는 풍습을 따른것이였다.

그리고 정효공주무덤벽화에 보이는 문지기장수의 겉옷이 맞깃으로 된것 역시 고구려무관의 옷깃여밈형식을 계승한것이였다.

정효공주무덤벽화에서는 저고리의 색갈이 흰색, 붉은색의 2가지로 나타나고있는데 동쪽벽 세번째 내시의 붉은색저고리는 흰점으로 이루어진 꽃무늬형태가 특이하다. 저고리의 붉은색, 흰색은 고구려개마무덤벽화의 귀족이나 수산리무덤벽화의 말을 다루는 사람의 저고리색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발해시기에도 지배계급의 저고리에는 내시의 저고리에 있는 꽃무늬와 같은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였다고 본다. 근로인민들은 이러한 화려한 무늬로 장식할수 없었으며 종래의 단순한 점무늬를 비롯한 기하무늬들만 리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발해시기 남자들의 겉옷에서는 고구려의 남자겉옷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일부 변화가 있었다.

정효공주무덤벽화의 남자들이 입은 겉옷은 깃형태가 둥근것으로서 고구려의 덕흥리무덤벽화에 보이는 13군태수들의 겉옷깃형식과 거의 같다. 다만 겉옷의 둥근깃반경이 고구려때보다 좁아지고 허리아래부분의 옆선을 터쳐주었으며 새로운 꽃무늬장식을 한것이 다를뿐이다.

발해사람들은 여러가지 머리쓰개도 리용하였겠으나 그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가 없고 다만 정효공주무덤벽화에 보이는 복두와 상경부근에서 나온 청동기마인물상의 책으로 짐작되는 쓰개가 나타났을뿐이다.

상경부근에서 나온 청동기마인물상의 책은 앞이 낮고 뒤로 가면서 높아진 한가닥의 뿔이 달린 고구려의 무관책과 매우 비슷하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문무관책이 발해에 그대로 계승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발해시기 남자들이 쓴 복두는 이 시기에 새로 나타난 머리쓰개로서 후기신라의 복두와 같은것이라고 본다.

복두의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한단 높은 둥근형태이며 뒤부분에는 모를 죽인 긴 날개가 달려있는데 색은 대체로 검은색이였다.

이 시기 남자머리쓰개에 복두가 새로 나타난것은 발해국가성립후 고구려의것을 계승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문물제도를 확립하는 과정에 사람들의 생활적요구와 미감을 반영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발해시기의 남자신발에는 고구려때와 같은 가죽신이나 짚신 등이 있었다.

정효공주무덤벽화에 의하면 문지기장수와 시종무관은 신목이 높은 검은색의 가죽신(화)을 신었으며 기타 악공, 내시, 시종들은 삼으로 만든 목이 없는 신(혜)을 신었다.

기록에 전해지는 발해의 암모화도 정효공주무덤벽화의 문지기장수와 시종무관의것과 같은 검은색의 목긴 가죽신이였다고 보고있다.

발해시기에 녀자들도 일상옷차림으로 저고리, 치마, 바지, 겉옷을 입은 다음 머리쓰개를 쓰고 신발을 신었다.

이 시기에는 짧은 저고리가 널리 보급되였고 이에 맞게 치마길이가 길어졌다고 본다.

발해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후기신라가 834년에 제정한 복식규정을 보면 《단의》라는 녀자저고리가 나오는데 이것은 길이가 짧은 옷 즉 저고리를 표현한것이였다.

녀자들의 짧은저고리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나타난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근로녀성들이 입던것이였다. 고구려의 고국원왕릉 동쪽곁간벽화에 보이는 방아찧는 녀자는 그 시기에 일반화되여있던 긴저고리가 아니라 짧은저고리를 입고있다. 짧은저고리는 긴저고리처럼 허리를 굽히는 경우 앞섶의 여밈이 아래로 내리드리우는것과 같은 불편한 점이 없는것으로 하여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에 널리 보급되였다.

발해시기에 녀자들은 저고리길이가 짧아지는데 맞게 치마길이를 변화시켜 입었다고 본다. 저고리는 짧게, 치마는 길게 만들어 입은데로부터 녀자들은 바지를 겉에 입은것이 아니라 치마안에 입었으며 저고리와 치마차림의 미를 돋구는데 관심을 돌리게 되였다.

발해시기에 녀자들도 자기의 정서와 취미에 맞는 머리쓰개와 신발을 리용하였는데 대체로 고구려의것을 계승한 머리수건, 털모자 등과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신발, 짚신 등이였을것이다.

이처럼 발해사람들의 일상옷차림은 선행한 고구려의것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요구에 맞게 발전시킨것이였다.

고구려와 발해옷차림의 계승관계는 다음으로 관복차림에서 찾아볼수 있다.

관복차림은 국가기관에 복무하는 관리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차려입은 정복차림을 말한다.

발해는 국가의 통치제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봉건적관료질서에 따르는 관복을 제정하였다.

고구려와 발해관복의 계승관계는 일반관리들의 공복색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공복은 국가관리임을 정식으로 표현하는 차림이다.

중국 력사책《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된 공복차림에 의하면 일반관리들의 공복은 3품이상의 색갈은 자색이고 홀은 상아홀, 패물은 금어대이며 4품, 5품의 색갈은 짙은 붉은색(비색)이며 상아홀에 은어대, 6~7품의 색갈은 연한 붉은색(천비)에 나무홀이며 8품의 색갈은 풀색이고, 패물은 나무홀이였다.

《신당서》의 자료를 통해서 발해의 공복색갈순위가 자주색, 짙은 붉은색, 연한 붉은색, 풀색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공복색갈은 정효공주무덤벽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옷색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무덤칸 동쪽벽에 나오는 내시는 붉은색옷을 입고 북벽에 나오는 시종은 자색옷을 입고있다.

시종과 내시가 품계가 높은 관리들의 옷색갈인 붉은색을 리용한것은 그들이 황족들에게 복무하였던데로부터 차례진 일종의 《특혜》라고 볼수 있다.

발해의 이러한 공복색갈과 순위는 고구려의 관복을 그대로 계승한것이다. 고구려 덕흥리무덤벽화의 주인공은 자색옷, 개마무덤벽화의 주인공은 붉은색옷, 고국원왕릉벽화의 성사, 문하배 등은 연한 푸른색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곧 그들의 등급관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고구려관복의 등급관계는 그 계승국인 발해에도 그대로 이어졌던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옷차림의 계승관계는 또한 군복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고구려와 발해군복의 계승관계는 전복과 갑옷차림에서 나타났다.

발해의 전복으로서 정효공주무덤의 무덤길동서벽에 그려진 문지지장수들이 입은것이 있는데 이들은 갑옷우에 맞섶으로 된 반소매의 붉은색겉옷을 입었다.

이러한 겉옷은 고구려 고국원왕릉벽화의 무관 장하독이 입었던 맞섶의 깃이 없는 겉옷을 계승한것으로서 전복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있다. 반소매형식은 이전과 차이나는데 그것은 삼국시기 녀자들이 입던 반소매겉옷인 반비를남자들도 입게 된것과 관련된것이라고 본다.

발해의 갑옷차림에서도 고구려와의 계승관계가 나타난다.

발해에도 여러 류형의 갑옷들이 있었겠으나 자료의 제한성으로부터 쇠갑옷, 청동갑옷, 가죽갑옷, 투구, 토수, 신발만을 알수 있다.

발해쇠갑옷의 형식은 정효공주무덤벽화에 나오는 문지기장수의 갑옷차림과 여러 유적에서 알려진 찰갑쪽유물을 통하여 알수 있다.

벽화에 나오는 문지기장수는 정수리에 붉은색의 술장식이 달리고 량쪽 귀부분에 날개장식이 달린 회색투구를 쓰고있다. 그리고 연한 노란색의 반소매찰갑저고리(갑옷소매는 검은 회색의 고기비늘모양으로 이어 만든 갑옷으로 되여있으며 소매가장자리에 붉은색의 선을 두른 다음 검은색의 술장식을 하였다.)를 입었으며 흰색바탕에 검은색꽃무늬를 놓은 토수를 끼고 검은색가죽띠를 띠였으며 검은색가죽장화를 신었다. 벽화의 제한성으로부터 자세히 알수 없으나 여기에 갑옷바지도 입었을것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갑옷의 찰갑쪽은 쇠로 만든것으로서 상경과 청해토성, 해림 이도하자무덤, 로씨야 연해변강 발해유적들 등 여러 지역에서 나온 다양한 형태의 찰갑쪽들과 같은 형태이다.

찰갑쪽들은 길이가 9~12.5cm되는 큰것, 7~8cm되는 중간것, 4~6.7cm되는 작은것 등이 있었고 그 형태는 장방형과 타원형이였다.

발해갑옷에 달린 찰갑쪽들의 크기와 형태가 여러가지였다는것은 당시 개별적인 갑옷에도 몸부위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된 찰갑쪽들을 달았으리라는것을 추측할수 있게 한다.

발해의 투구는 쇠투구로서 상경부근의 무덤에서 드러난것이 현재 할빈박물관에 보관되여있다. 이 투구는 8개의 쇠쪼각을 무어 반구형으로 만든것인데 쪼각들은 못으로 고정되였다. 투구꼭대기에는 구멍이 있는데 술장식꼭지를 끼웠던 자리로 인정된다.

고구려의 고국원왕릉벽화의 행렬도, 안악제2호무덤과 감신무덤벽화의 문지기장수, 집안 통구 사신무덤벽화의 기병들을 비롯하여 고구려무덤벽화에 형상된 군사들의 대부분이 장방형 또는 비늘형찰갑쪽들을 련결하여 만든 갑옷저고리를 입고 술장식이나 날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갑옷차림이 발해에 그대로 계승되였다는것을 직관적으로 잘 보여주고있다.

발해투구에는 쇠물을 부어 주조한 반구형의 투구도 있었다. 특징적인것은 눈과 귀부위를 나타내는 오목진 부위들이 나타나고있는것이다. 투구정면 웃부분에는 3쌍의 원형으로 된 볼록장식이 좌우로 대칭되면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징을 박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투구의 제작수준으로 보아 일반군사들이 썼던것으로 볼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발해갑옷과 투구가 고구려의 찰갑옷형식과 징박이기법(철판들을 못으로 고정시키는 방법)에 의한 투구제작기술을 계승하여 만들어졌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발해는 갑옷차림에서도 선행한 고구려의것을 계승하였으므로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고 《해동성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칠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옷차림을 통하여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