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기 농업발전에 대하여 연구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잘 알고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높이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10세기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고려는 신라가 차지하고있던 대동강이남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멀리 북쪽에서 이주하여온 발해의 유민들까지도 하나의 주권밑에 통합하였으며 광활한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힘찬 투쟁을 벌렸다. 고려라는 이름도 고구려에서 유래한것이다.》 (
고려는 왕조성립후 18년동안의 간고한 통합전쟁 을 통하여 각지에 웅거하고있던 할거세력들과 신라왕조를 귀순시키고 후백제를 타승하였으며 대동강이북의 고구려의 남쪽 옛땅을 장악하고 발해유민들을 포섭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국토의 통일을 이룩하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되였다.
고려에 의하여 국토가 하나로 통합된 후 우리 나라는 사회경제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통일적인 발전, 급속한 발전이 이룩되게 되였다.
고려는 후삼국통합후에도 계속 령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농산지역을 확대시켜나갔다. 그리하여 농업생산에서는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고려시기 농업을 발전시킬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첫째로, 인민들의 창조적투쟁으로 부침땅면적이 늘어난데 있다.
부침땅면적을 늘이는것은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킬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된다.
무엇보다먼저 고려인민들은 반침략전쟁후 황페화된 농경지들을 복구하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다.
고려는 10세기말~11세기초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그때마다 고려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수많은 농경지를 페경하지 않을수 없었다.
10세기말부터 시작하여 20여년에 걸친 거란침략자들의 침입으로 하여 많은 농경지들이 황페화되였으며 농업생산은 심히 약화되였다. 그러나 용감하고 근면한 고려인민들은 전쟁의 상처를 빨리 가시기 위한 농경지복구사업에 힘있게 떨쳐나섰다.
농경지복구에서 앞장선것은 전쟁피해가 가장 심하였던 나라의 서부지역과 중부지역의 인민들이였으며 전쟁피해가 비교적 덜하였던 남부지역의 인민들도 농경지를 복구하는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1019년 11월 봉건정부는 강(한강)남쪽지역 인민들을 상산, 이천, 수안, 신은, 협계, 우봉 등지에 이주시켜 농경지를 복구하고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정부에서 징발한 인
고려인민들은 녀진침략자들에 의하여 황페화된 농경지도 짧은 기간내에 복구하였다.
반거란, 반녀진 전쟁후 고려인민은 황페화된 농경지를 복구한데 머무른것이 아니라 더욱 확대하였다. 고려인민들은 경내에서뿐 아니라 천리장성밖에까지 진출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장하였다.
《고려사절요》 권5 문종 27년 여름 4월조에는 《장성밖 개간전 1만 1 494경을 가을을 기다려 추수하여 군사에 충당할것을 청한》 서북로병마사의 제기를 국왕이 승인한데 대한 글이 씌여있다. 이것은 고려에서 천리장성밖에서도 개간사업을 적극 벌렸던 사실을 반영하고있다.
다음으로 고려인민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 농경지를 부단히 확대시켜나갔다.
우선 다락밭조성사업을 부침땅면적을 늘이는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고 힘찬 투쟁을 벌렸다.
고려인민들은 개간하기 쉬운 평지대의 묵은 밭은 물론 산비탈지에까지 돌을 쌓고 층계를 형성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조성하였다.
1123년에 송나라 사신 로윤적을 따라 고려에 왔던 송나라 관리 서긍의 견문기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국토가 동해에 면하여있으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산이 높고 가파로우며 평지가 적으므로 밭을 산간지대에 많이 만든다. 높고낮은 밭이랑을 힘써 만들어 경작하고있는데 먼곳에서 바라보면 계단식돌다리(제교)같다.》고 씌여있다.
또한 흙깔이에 의한 새땅조성사업도 힘있게 벌렸다.
《고려사절요》 권4 문종 3년 12월조에 의하면 오늘의 금야에서 《모래와 돌이 있는 경작할수 없는 땅에 곡식을 심게 하여 해마다 잡곡 200여곡(섬)을 수확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력사를 전하는 책들에는 금야에서의 개간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였는가 하는것을 전하는 글은 없다. 그러나 《모래와 돌이 있는 경작할수 없는 땅》에서 수백섬의 낟알을 거두어들이자면 반드시 흙깔이에 의한 토양개량이 있어야 한다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고려때 2 000~3 000말의 잡곡을 수확할수 있는 결수는 7~10결, 면적은 7~20여정보에 달한다.
7~20여정보의 경작지가운데서 자갈밭이 가령 3분의 1에 해당한다 하여도 흙깔이작업량이 상당하였으리라는것을 짐작할수 있다.
또한 간석지를 논으로 풀기 위한 사업도 적극 벌렸다.
뚝을 쌓고 간석지에 논을 푸는 일은 고려시기에 들어와서 전보다 크게 벌어졌다.
고려인민들은 강하천언저리에 뚝을 쌓는 사업이 밀물이 흘러드는것을 막아 썰물 때 드러나는 개바닥을 논으로 풀뿐 아니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라는것을 간주하고 이 사업을 줄기차게 벌려 농업생산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1256년(고종 43년) 2월 국왕의 명령에 《…또한 문무관3품이하 권무이상 관리들이 차등있게 부역군을 내여 제포와 와포에 제방을 쌓고 좌둔전을 만들며 리포와 초포에 제방을 쌓고 우둔전을 만들것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좌우둔전은 모두 금강지류의 언저리에 물막이뚝을 쌓고 개간한것들인데 이것들은 밀물 때에 강하천물이 넘어나 전날에는 경지로 리용할수 없었던 개바닥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전환시킨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한 경작지조성은 고려의 농업생산발전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고려시기 농업을 발전시킬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둘째로, 고려인민들의 창조적활동에 의하여 알곡작물종류와 과일나무와 남새, 섬유작물과 약용작물 등 농작물종류가 확대되였으며 영농기술이 훨씬 개선된데 있다.
고려시기에 들어와서 후세에 보이는 거의 모든 알곡작물종류들이 재배되였다. 고려시기에 벼과알곡작물과 콩과알곡작물, 여뀌과알곡작물들이 많이 재배되였다. 또한 배, 복숭아, 추리, 밤, 대추, 귤나무 등 과일나무들이 많이 재배되였는데 이러한 과일나무종류들은 앞선 왕조시기에도 재배되였으나 그가운데서 일부는 이시기에 와서 처음으로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기의 기록들에서 전해지고있는 남새류로서는 배추, 무우, 부루, 가지, 물외, 동아, 마늘, 깨, 파, 부추, 아욱 등이다. 이러한 남새종류는 앞선 왕조시기에도 재배되였을수 있으나 대부분의 품종은 고려에 들어와서 널리 보급되였던것으로 추측된다.
알곡과 과일, 남새밖의 농작물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것은 섬유작물과 약용작물이였다.
섬유작물은 천을 짜는 원료로 되는 삼과 모시, 목화 등이였다.
1029년 1월 고려봉건정부는 각 도의 고을들에 명령하여 뽕나무를 밭머리에 심게 하였다.
봉건정부는 1188년 3월에도 농민들에게 뽕나무를 심도록 명령하였다.
고려시기에는 영농기술발전에서도 큰 전진을 이룩하였다.
고려의 영농기술발전에서 주목할만 한것은 논밭을 걸구는 시비법이 개선되고 논농사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였으며 과수업에서 새로운 접목법 등이 적용되고 독특한 과일보관법이 창안된것이다. 새로운 농기구들도 많이 만들어져 농업생산에서 많은 성과들이 이룩되였다.
고려에 들어와서 농업생산을 늘이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서 자급비료의 섞어쓰기와 시비법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들이 강구되였다.
고려사람들은 풀거름만 만들어낸것이 아니라 짐승의 배설물 같은것을 섞어서 만든 두엄을 내서 땅을 걸구었다. 《동국리상국후집》 권7에 실린 시 《땅이 기름진데 비가 오고 거름을 주니 토란줄기는 중천에 뜬 북두7성처럼 크게 자랐다》를 보고서도 당시 고려에서 농작물에 비료를 주고 가꾼 정형을 짐작할수 있다.
고려에서 해마다 불역전이 많이 도입되였다는것은 논밭에 비료를 많이 주어 땅을 걸구었다는것을 말해준다.
고려에서 2모작이 널리 보급된것도 자급비료를 많이 주어 땅이 걸어진것과 적지 않게 관련되여있다.
고려시기 농사법에서 이룩된 성과의 하나는 모내기법이 보급된것이다.
우리 나라 봉건시대초기부터 실시되여온 모내기법은 고려에 들어와서 더한층 보급되였다.
14세기 시인 박효수의 모내기에 대한 시에서는 고려에서 모내기가 널리 실시된 정형을 잘 보여준다. 그가 읊은 시 《모내기노래 바람에 실려온다》는 당시 모내기가 진행되는 모습을 잘 형상하고있다.
고려시기 과일나무접목도 능숙하게 하여 과일재배기술을 발전시켰다. 《리규보작품선집》(2) 접과기에서 밝힌바와 같이 《뒤터에 나쁜 배나무 두그루 있는것을 키다리 전씨는 두그루 다 톱으로 밑그루를 베여버리고 좋은 배로 이름난 나무의 아지를 몇개 베여다가 그것을 밑그루를 베여버린 그 나무에 붙이고 이긴 흙으로 봉하여두었다.》고 한 력사적사실은 고려인민들의 과일나무접합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고려시기 농업을 발전시킬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셋째로, 인민들의 애국적열의와 근면한 로동에 의하여 관개수리사업이 활발히 진행된데 있다.
관개수리사업은 농작물에 필요한 물을 인공적으로 대주어 큰물과 가물피해로부터 토지와 농작물을 보호하며 농작물의 물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중요한 사업이다. 물은 농업생산의 기본요인이며 물이 없이는 농업생산의 장성을 기대할수 없는것이다.
1188년 3월에 봉건정부는 전국적으로 관개용저수지를 건설할데 대한 국가적조치를 취하였다.
경상도 밀양 수산제도 고려때 건설된 관개용저수지의 하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6 밀양 고적조에는 《수산제는 수산현에 있었는데 둘레는 20리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고려의 김방경이 이 저수지뚝을 쌓고 논에 관개하였다.》고 씌여있다.
새로 관개용저수지들을 건설하는것과 함께 이미전에 건설된 저수지들도 복구되여 관개에 리용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상주 산천조에는 《(공검지)는 고을 북쪽 29리에 있다. 고려 명종때* 사록 최정분이 옛 뚝자리에 쌓았다. 제방의 길이는 860보, 둘레는 1만 6 647자이다.》고 씌여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공검지 수축년대를 명종 25년 (1195년)으로 밝히고있다.
1469년에 편찬된 《속찬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경상 1개 도에만도 722개의 저수지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려시기와 15세기초에 건설된것들이라고 한다.
그후 고려에서는 관개저수지의 건설사업과 함께 수차를 관개에 리용하는 문제도 여러번 시도되였다.
이처럼 농업생산을 장성시키기 위한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적극적인 투쟁에 의하여 농업생산은 이전시기에 비하여 훨씬 장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