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우리
시대와 력사앞에 5천년민족사가 알지 못하는 거창한 업적을 이룩하시였건만 우리
우리 인민들은 해마다 태양절을 맞으며 만경대고향집을 찾아보군 한다. 하지만 찾을 적마다 사람들은 벼짚이영을 덮은 초가집의 두칸방에 다락과 허청간, 그안에 소장되여있는, 해방전 어느 농가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수수한 기물들, 어데를 둘러보아도 조촐한 가구하나 눈에 띄지 않는, 너무도 소박한 살림살이도구들을 보며 새롭고 깊은 감동을 금치 못한다.
우리 혁명의 만년재보의 하나인 귀중한 사적물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만경대고향집이 예나 지금이나 본래의 모습대로 보존되고있는 여기에는 만경대일가분들의 소박한 성품과 함께
해방후 이 력사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수 없었다.
당시 년로하신 조부모
그래서 적지 않은 일군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고향집에 필요한 강사도 두고 더우기는 보존대책이 없이 그대로 놓여있는 사적물들과 유물들을 원상대로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과학기술적대책을 세우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1959년 리보익할머
이제는 만경대고향집의 보존관리문제가 더는 미룰수 없는 절박한 문제로 나서게 되였다.
우리 일군들을 고향집을 영구보존하며 만경대일가분들의 사적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유적, 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대책안을 세우게 되였다.
사실 온 세상사람들이 우러러 찾아오는 만경대고향집의 유적, 유물들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한 당적, 국가적대책을 세우는것은 너무도 응당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풍화작용을 받지 않도록 고향집에 덧집을 씌우는 문제와 개별적인 유적, 유물들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진렬실을 새로 꾸리는것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필요한 대책들을 예견하게 되였다.
그러던 주체50(1961)년 2월말의 어느날
일군들은 속으로 환성을 올리며 이 기회에 자기들의 생각을
한 일군이 지금 할아버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의견을 제기하였던 일군은
그러나 그는 다시 용기를 내여 그러면 올해에는 못하더라고 다음해에는 진렬실을 짓도록 꼭 국가계획에 예견해주셨으면 한다는 의견과 함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사적물들을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취하고있는 대책들에 대하여 말씀올리였다.
거듭 간청하는 그 일군을 다정히 바라보시던
일군들은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만경대고향집 가까운 갈매지벌과 송산벌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는
그러나 우리 인민의 근대력사와 더불어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어온 유서깊은 고향집과 그 귀중한 유적, 유물들은 오늘도 의연히 원래의 모습 그대로 허청간과 야외에 전시되여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경건한 마음으로 만경대혁명일가분들의 한없이 고결한 풍모에 대하여 가슴깊이 되새겨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