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절세위인들의 령도사적이 뜨겁게 깃들어있는 력사유적-현무문

 2024.4.24.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많다.

평양의 자랑인 모란봉의 최승대와 을밀대사이(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속함)에 위치하고있는 현무문은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체35(1946)년 3월 2일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다녀가신 영광의 사적이 깃들어있는 력사유적이다.

현무문은 6세기중엽에 동방강국이였던 고구려가 수도성인 평양성을 쌓을 때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고구려는 552년~586년에 강대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 평양성을 건설하였는데 성안을 성벽들로 가로막아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성으로 구분하였다.

내성의 북쪽에 축조된 북성에서 현무문이 위치하고있는 곳은 평양성 북방방위의 중요한 요충이였다.

고구려시기에 세워진 현무문은 그후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보수와 개건을 거듭하면서 내려왔다.

현무문은 북쪽문이라는 뜻이며 현무는 사신가운데서 북쪽방위신으로 되여있다.

현무문은 성벽의 연장으로 되는 축대와 문길, 축대우에 세운 문루로 이루어졌는데 지금의 문루는 1714년에 다시 세운것이다.

현무문은 전체 모습에서 고구려시기의 독특한 성문형식을 잘 보여준다.

축대는 고구려성벽과 같이 4각추모양으로 다듬은 성돌로 세로 차곡차곡 포개여쌓았고 그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였다. 축대의 높이는 약 2.5m이고 그 우의 변두리에 성가퀴를 돌렸다.

그리고 서로 어기게 쌓은 량쪽성벽사이에 성문의 평면이 모로 놓이게 하고 바깥쪽성벽을 성문앞으로 내밀어 옹성을 대신케 하였다.

축대우에 세워진 문루는 정면 3간(7.05m), 측면 1간(3.1m)의 홑처마합각집이며 흘림기둥에 두공을 쓰지 않은 간소한 편이고 건물안의 천정은 통천정으로 처리하였다. 건물에는 모루단청을 입혀 주위의 자연풍치와 잘 어울리게 하였다.

이러한 성문형식은 평양성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을 비롯하여 고구려시기의 성문들에서 볼수 있다.

성문을 이렇게 배치하면 성문을 나드는 아군의 은밀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적들이 쳐들어오면 좁은 통로로 구불구불 에돌아야 하기때문에 아군이 방어하기 좋은 유리한 우점을 가지고있다.

우리 선조들의 높은 애국주의정신과 뛰여난 성문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인 현무문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에 의하여 심히 파괴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 우리 혁명앞에 가로놓인 수많은 애로와 난관을 헤쳐나가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력사유적유물들을 보존하며 전쟁에 의하여 파괴된 유적들을 복구정비하는 사업을 강화하도록 하시였으며 당시 나라의 형편이 몹시 어려웠지만 파괴된 평양성 북성의 북문인 현무문을 원상대로 복구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2(1953)년 8월 5일에 소집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전원회의에서 하신 보고 《모든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에서 문화선전기관들의 복구건설방향을 제시하시면서 력사유적유물들을 보존하며 전쟁에 의하여 파괴된 유적들을 복구정비하는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현무문
사진. 현무문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3(1954)년 7월 30일 내각참사에게 주신 지시에서 최근에 복구건설장들에서 공사과정에 력사유적과 유물들이 적지 않게 발굴된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들이 남긴 력사유적과 유물 하나하나는 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연구하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증거물들이라고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모든 단위들에서 공사과정에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발견하는 경우 그것을 즉시 해당 시, 군인민위원회에 통보하며 시, 군인민위원회에서는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당시)에 보고하고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에서는 력사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였다는 보고를 받으면 지체없이 과학원(당시)과 협의하여 그것을 책임적으로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이와 함께 복구건설장들에서 새로 발견되는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잘 발굴하고 보존관리할데 대한 내용으로 내각지시를 시달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3(1954)년 12월 11일 개성시 당, 정권기관 및 경제, 교육문화기관 일군협의회에서 하신 결론에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력사유적들과 문화유산들을 잘 보존관리하여 그것을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인민들이 자기 민족의 슬기로운 력사와 문화를 잘 알며 자랑할수 있도록 고적들을 원상대로 복구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전후에 모든것이 부족하고 그처럼 어려웠지만 현무문은 전쟁이 끝난지 불과 1년만인 주체43(1954)년에 원상대로 복구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1(1962)년 4월 20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하신 담화 《모란봉은 인민의 유원지이다》에서 모란봉은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인민의 유원지로, 근로자들의 문화휴식터로 전변되였다고 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쟁으로 모든것이 파괴되고 재더미만 남았던 전후복구건설의 어려운 시기에도 모란봉을 훌륭한 인민의 휴식터로 꾸리실 원대한 구상을 펼쳐주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시여 위대한 장군님께서위대한 수령님의 구상을 높이 받들고 평양시민들이 한사람같이 떨쳐일어나 모란봉에 갖가지 꽃나무와 과일나무, 화초를 정성껏 심고 가꾸었으며 파괴되였던 극장과 고적들도 다시 일떠세웠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령도사적이 깃들어있는 력사유적-현무문은 오늘도 우리 당의 옳바른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옛모습그대로 잘 보존되여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서 가치있는 자료로 리용되고있을뿐 아니라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높여주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