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선교사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여들었던 미제승냥이놈이 조선의 한 어린이가 사과밭에서 떨어진 사과 한알을 주었다고 하여 그의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겨놓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
미국은 1882년 5월 《조미조약》을 체결한 이후부터 조선에 수많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장차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정신사상적면에서의 종교전파를 강화하였다.
1885년 4월 5일 미국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부부가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이후부터 모페트, 헤론, 스크랜톤을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교원이나 의사의 자격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다.
미국선교사들이 의사나 교원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온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봉건정부가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허용하지 않고있던 실정과 관련되였다. 때문에 미국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처음에는 교회당이 아니라 학교와 병원들을 세우게 되였다.
1886년에 조선봉건정부가 유미렬강들의 문화적침투와 압력에 못이겨 교회당의 설립과 종교전파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이후에도 미국선교사들은 교회당과 함께 각지에 설립한 학교와 병원들을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선교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여기서 순진한 조선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선》과 《박애》를 설교하였다.
그러나 미국선교사들은 겉으로는 자신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등을 설교하고 실천하는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그 막뒤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수많이 감행하였다.
그 대표적실례가 1925년 7월에 있은 김명섭소년사건으로서 그 전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당시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에는 조선에 침투한 미국그리스도교 교파의 하나인 《제7일 예수재림교회》의 부속으로 된 순안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원장은 의료선교사인 씨. 에이. 페스머(조선식이름 허시모)였다.
이때 교회병원 원장의 탈을 쓴 페스머는 의료사업을 통하여 전도활동을 진행하면서 한쪽으로는 선교사의 직분에는 어울리지 않게 돼지와 오리를 기르는 목장과 과수원까지 경영하면서 돈벌이를 하고있었다.
7월 25일 페스머는 사나운 개를 끌고 자기가 경영하는 과수원을 돌아보다가 김명섭을 비롯한 어린 조선소년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사과(당시의 신문보도에서는 능금알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아직 익지 않은 올사과를 의미한다-필자)를 줏는것을 발견하였다.
미국선교사가 사나운 개를 끌고 나타나자 겁에 질린 소년들은 일시에 달아났으나 나어린 명섭이는 그만 불행하게도 붙잡히고 말았다.
페스머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명섭이를 자기 집으로 끌고가서 집앞에 있는 복숭아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그의 어머니에게 너의 아들이 신성한 교회의 과원에 뛰여들어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혔는데 《돈 5원을 내든지 얼굴에 도적이라고 쓰던지 어느것을 하겠느냐》고 인간으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날강도적인 요구를 들이대였다.
7살에 아버지를 잃은 명섭이의 집은 가난하기 그지없어 페스머가 요구하는 돈을 도저히 낼수 없는 불쌍한 가정이였다.
나무에 묶여있는 사랑하는 아들의 불쌍한 모양에 정신이 절반 나간 명섭이의 어머니는 땅바닥에 엎드려 페스머에게 지금 당장 돈이 없으니 제발 아이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이미 인간이기를 그만둔 승냥이 페스머는 아직 철부지인 12살 어린 소년의 량편볼에 청강수로 각각 《도적》이라고 새기는 악행을 서슴없이 감행한후 인차 지워지니까 일없다고 뇌까리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명섭이를 집으로 쫓아버렸다.
집에 돌아온 명섭이는 그 쓰라린 아픔으로 온밤 잠들지 못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량편볼에 더욱 뚜렷해지는 《도적》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며 피눈물을 흘리였다.
다음날 아침 격분한 명섭이의 어머니가 페스머를 찾아가 아들의 고통을 덜고 《도적》이라는 글자를 지을 약이라도 줄것을 요구하며 항의를 들이대자 페스머는 오히려 도적질한 놈이 무슨 잔소리인가 하며 명섭이의 어머니에게 온갖 쌍욕을 퍼붓고 매질을 하려고 달려들던 나머지 큰 호미를 내던지며 돈을 못냈으니 일주일동안 자기 과수원에서 김매기를 하라고 떠벌이였다.
김명섭소년사건은 처음에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가 1년이 지난 1926년에야 평양과 경성을 비롯한 온 나라에 퍼지였다.
페스머의 악행은 전체 조선인민의 증오와 격분을 자아냈다.
사건이 발생한 순안일대의 청년들은 미국선교사 페스머의 포악무도한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회를 열고 미국인배척운동을 일으키였고 평원에서는 시민대회를 열고 악인 페스머를 처단할것을 호소하였다.
평양일대 그리스도교계통의 소년 및 청년단체들과 유지들은 1926년 6월 31일에 이와 관련된 회의를 열고 리덕인 등 조사위원들을 선출하였으며 다음날인 7월 1일에는 그들을 사건이 발생한 순안에 직접 파견하고 페스머가 감행한 범죄의 동기와 진상을 구체적으로 조사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7월 1일 오후 평양에 있는 그리스도교청년회관에서는 미국인만행성토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페스머의 반인륜적범죄를 고발하는 만행조사보고가 발표되였는데 그에 격분한 연설자들은 저저마다 나어린 조선소년에게 전대미문의 악행을 감행한 페스머의 상판에도 청강수와 같은 독약으로 야수라는 표적을 새기고 미국으로 추방할것을 한결같이 주장하였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의 언론들도 미국선교사 페스머의 만행을 련이어 폭로단죄하였다.
그러나 나라잃은 망국노의 처지에 있던 우리 민족의 분노와 원한을 풀어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날이 높아가는 사회적여론에 당황한 일제경찰은 조사를 벌리는척 하다가 미국선교사들과 결탁하여 형식상 재판을 벌려놓고는 징역 3개월이라는 기만적인 판결을 내리고 페스머를 미국으로 빼돌리였다.
과수원에 떨어진 한알의 사과를 주었다고 하여 12살 나어린 소년의 얼굴에 청강수로 영원히 지을수 없는 《도적》이라는 글을 새긴 페스머의 잔악무도한 행위는 조선에서 사랑과 자비를 떠벌인 미국선교사들이 결코 하느님의 사도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이였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야수의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며 변할수도 없다.
이 땅에서 만인을 경악케 한 김명섭소년사건이 있은지도 9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전체 조선인민은 하늘땅에 사무친 그 원한을 잊지 않고 대를 이어 전해가며 조선에서 감행한 미국의 식인종적만행을 천백배로 복수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