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재정금융학부 교수 박사 윤영순
2022.1.26.
국제주의전사 장울화에 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적의리는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이 순결하고 숭고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장울화는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나는 한시도 그를 잊은적이 없었다. 장울화가 남기고간 그 인간적향기는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나의 페부에 더 깊숙이 젖어들었다.》 (《김일성전집》 제98권 413페지)
장울화는 혁명을 하지 않아도 호의호식할수 있는 사람이였지만 주체26(1937)년 음력 10월 2일 25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위대한 수령님을 위하여 조선혁명의 사령부와 조중인민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사랑하는 부모처자와 아름다운 모든 숙망을 뒤에 남기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적의리를 지니시고 그가 서거한 다음에도 한시도 그를 잊지 않으시고 그 후대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전쟁후 수많은 중국동지들과 은인들가운데서 자신의 추억속에 제일 선참으로 떠오른 사람은 장울화였다고 하시며 그가 남기고간 부모처자들을 생각하시였다. 특히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뒤 내전의 불길이 만주전역을 휩쓸던 시기에 장울화네 유가족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제일 많이 하시였다. 그것은 장울화가 공로를 많이 세운 혁명렬사인것만은 사실이나 지하공작을 많이 한 사람인것만큼 대중이 큰 부자집자식인 그를 공산주의자로 인정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과 반미대전, 사회주의기초건설이 복잡한 속에서도 그들과 만나게 될 날을 일구월심으로 기다리시였다.
그러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이 만주행을 하게 되였을 때 단장인 박영순동지에게 장울화가족의 행처를 알아보도록 임무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영순동지에게 마안산밀영에서 아이들이 병마와 추위에 떨고있을 때 우리에게 천도 보내주고 돈도 보내주던 <형제사진관>의 장울화가 세상을 떠난지도 스무해가 넘었는데 아직 그의 부모처자들에게 문안인사조차 변변히 하지 못했다고, 무송에 가면 자신을 대신하여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울화는 국적은 다르지만 조선사람이나 조선의 혁명가나 다름없다고, 그가 남긴 업적은 중국의 공산주의운동뿐아니라 우리 나라의 항일혁명력사에서도 당당한 한페지를 차지할수 있다고 하시며 만일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무송에서 살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다면 공안기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이 그 행처를 알아내야 한다고 부탁하시고는 무송소식을 무척 기다리시였다.
박영순동지로부터 장울화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이 아들 장금천과 딸 장금록을 데리고 무송의 옛집에서 검박한 생활을 하고있다는 소식과 장금천의 편지까지 받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음속에 고이고 고인 련민의 정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장울화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적의리는 그가 남기고간 자식들을 여러차례 만나시는 과정에 새로운 양상으로 심화발전되였다.
주체73(1984)년 5월 기차로 중국 동북지방을 통과하시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기서 멀지 않은 무송에서 장울화네 가족들이 살고있는데 그들에게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중국의 관계부문일군들을 통하여 전달해주도록 하시였다.
그후 조국에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금천의 두번째편지를 받으시고 그를 평양에 초청하시였다. 조선방문의 길에 오른 장금천과 장금록, 장기일행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미 고인들이 된 장울화부부의 모습을 찾아보시다가 장울화를 만났을 때처럼 장금천, 장금록, 장기를 한아름에 그러안으시며 너희들을 환영한다고 외교관례를 벗어나 중국말로 거침없이 말씀하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금천일행에게 우리는 한집안식구인데 축배사 같은것은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여기에 앉은 사람들의 건강과 조중친선을 위하여 잔을 찧자고 하시며 그들을 위한 환영연을 베푸시였다. 그 자리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의 할아버지는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고 너의 아버지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도와주었다고 하시며 장씨가문의 공적을 한마디로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금천일행이 무송사람들과 가문을 대표하여 선물을 올리자 그 답례로 금시계를 장금천과 장금록, 장기의 팔목에 하나씩채워주시였다. 그리고 장금천이 평양에서 종합검진도 받고 못쓰게 된 어금이대신 금틀이도 해넣도록 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번째로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장금천일행들을 상봉해주시였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귀국의 길에 오르는 그들을 위해 3시간에 걸치는 오찬을 마련해주시고 사진업으로 혁명에 투신한 장울화의 모범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각각 1대씩 사진기를 선물하시였다. 헤여지시면서는 일을 잘하고 우수한 공산당원이 되라고 하시며 너희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없이 자랐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이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어버이 수령님의 사랑속에서 장금천은 주체76(1987)년에 처와 아들, 손녀들을 데리고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성관례를 초월하시여 그들을 여러차례나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전용비행기와 특별렬차를 내주시였으며 많은 봉사원들도 붙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1(1992)년 4월에도 자신의 탄생 80돐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장금천일행을 만나주시였는데 방문회수가 잦아질수록 위대한 수령님과 장울화의 후손들사이의 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열렬해지셨다. 이러한속에 장금천이 아버지의 서거 55돐을 맞으며 묘비를 새로 세우려고 한다는것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울화의 묘소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념비를 세워주겠다고 하시며 그것을 받아서 세우기 위한 준비를 잘 하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하여 청춘을 바친 국제주의전사 장울화의 묘비에 장울화렬사의 혁명업적은 조중인민의 친선의 빛나는 상징이며 렬사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업적은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라는 뜻깊은 친필을 새겨주시였다. 그러시고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런 기념비를 수천수만개를 세운들 자신을 위해 한목숨을 바친 장울화의 그 은혜야 어떻게 갚겠는가고 하시면서 장울화의 후손들을 위해서는 사업시간을 아낌없이 바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장울화의 묘소를 찾고싶으나 그것이 한갖 소망으로만 남아있을것 같아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하시며 그 소망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꿈에라도 옛 전우의 곁으로 찾아가고싶다고까지 하시였다.
이렇듯 국제주의전사 장울화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혁명적의리는 그가 서거한후에도 세월과 더불어 계속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