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시 송악산의 남쪽기슭에 넓게 펼쳐진 만월대는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대화궁유적과 함께 고려시기의 궁전유적들로서 평양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안학궁터,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경복궁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남긴 가장 대표적인 왕궁유적들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더 많이 발굴하고 잘 보존관리하여야 하며 우리 나라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커다란 민족적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
평양의 대화궁은 고려가 자기 수도를 당시의 서경이였던 평양으로 옮길 목적밑에 12세기전반기에 건설하였던 고려봉건국가의 기본왕궁이였다.
대화궁유적은 크게 궁성과 궁전터로 구분된다.
대화궁성은 동쪽과 서쪽의 산릉선들이 왕궁을 품어안는듯이 약간 밖으로 둥글게 돌아 뻗어내리면서 북쪽으로는 높아지고 남쪽으로는 낮아지면서 에워싸막는 모양을 이룬 지형에 위치하고있다. 대화궁성은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평산성형식으로서 성의 둘레길이는 3 000m정도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55만m2에 달한다.
궁전터는 대화궁성의 안에 크게 2개의 구역 즉 제1궁전구역과 제2궁전구역으로 나뉘여져 위치하고있다.
제1궁전구역에는 웅장한 궁전건물터들과 여러 문터들이 질서있게 배치되여있으며 제2궁전구역의 궁전건물터, 문터 등 건축유적들도 산경사면을 따라 여러개의 층을 이루며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여있다.
제1궁전구역의 부지면적은 약 2만m2인데 그중 1호건축터에는 높은 축대와 넓은 마당, 건물터로 올라서는 계단,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추정되는 궁전건물터, 건물터의 좌우에 나래채형식으로 잇달려붙은 동쪽단과 서쪽단들, 회랑터들이 있다. 이 1호건축터를 《고려사》에 나오는 건룡전터로 추정하고있다.
제1궁전구역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가량 떨어진곳에 제2궁전구역이 자리잡고있다. 제2궁전구역에는 1호, 2호, 3호, 4호건축터들이 있으며 매 건축터들에는 축대,마당, 회랑터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여있다. 제2궁전구역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1호건축터와 3호건축터인데 1호건축터는 동서길이 71m, 남북너비 40m로서 면적이 2 840m2이다. 1호건축터에는 웅장한 규모의 궁전건물터와 함께 회랑터가 정연하게 알려졌는데 이 회랑터는 궁전건물을 동쪽, 서쪽, 남쪽으로 둘러막았던 기본회랑터, 궁전건물과 남쪽의 기본회랑을 이어주는 련결회랑터, 궁전건물의 북쪽에 있는 보조회랑터들로 이루어져있다. 대화궁에서 기본정전건물로 리용되였된것이라고 보고있다.
3호건축터는 규모는 얼마 크지 않으나 독특한 평면짜임새로 하여 《고려사》 묘청렬전에 나오는 팔성당터로 인정하고있다. 《고려사》 묘청렬전에 씌여진 8성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고조선, 고구려의 옛수도였던 평양을 또다시 수도로 정하고 자기 나라를 고구려와 같은 강국으로 만들려는 고려시기 사람들의 지향이 뚜렷히 나타나있다.
대화궁터를 발굴하는 과정에 수기와, 암기와, 막새기와를 비롯한 많은 기와유물들과 룡을 형상한 잡상들, 물고기지느러미를 형상한 장식품, 장식무늬벽돌 등 여러가지 유물들이 발견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있다.
대화궁터에서는 이밖에도 꽃잎무늬장식벽돌들을 수직으로 올려쌓아 만든 옹벽시설과 독특한 짜임새를 가진 여러가지 형식의 배수시설들을 비롯하여 대화궁터발굴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건축시설들이 적지 않게 알려졌으며 대화궁유적발굴과정에 우리는 고려시기의 왕궁건축에 대한 풍부한 표상을 가지게 되였다.
방대한 규모의 대화궁유적을 전면발굴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 고려시기에 건설되였던 평양의 대화궁과 여기 개성의 만월대와 여러 측면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것을 잘 알게 되였다.
고려시기의 대화궁유적과 만월대와의 호상관계에서 공통되는 점은 우선 궁전터들이 평산성형식의 궁성에 둘러싸여있으며 궁전건물터들이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지며 차례로 배치되여있는것이다.
대화궁성과 만월대궁성에서의 공통점은 궁전터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성의 사명이나 지형을 합리적으로 리용하여 쌓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성축조방식에도 맞으며 고구려, 발해, 고려에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중세수도성의 형식변천에도 잘 부합되는것이다.
대화궁터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성의 만월대 기본건축군에서 회경전터, 장화전터, 원덕전터들이 북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놓여있으며 만월대의 서쪽부분에 있는 궁전건물터들도 역시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지며 차례로 배치되여있다.
대화궁터와 만월대는 위치선정과 건물배치에서 다같이 전체적으로는 엄숙하면서도 안정된 감을 느끼게 하며 선행한 고구려왕궁터와의 계승관계를 보여준다.
고려의 왕궁터들인 대화궁터와 만월대와의 호상관계에서 공통되는 점은 다음으로 대화궁과 만월대 궁전건물터 중심축선이 일직선이나 평행으로가 아니라 조금 어긋나게 설정되여있는것이다.
대화궁 제1궁전구역과 제2궁전구역 중심축선들이 서로 사귀게 설정되여있으며 이 대화궁유적과 마찬가지로 만월대 궁전건물터들인 회경전의 중심축선과 장화전터, 원덕전터들의 중심축선이 평행이나 일직선이 아니라 서로 어긋나게 설정되여있다.
대화궁터와 만월대의 궁전건물터 중심축선들이 서로 어긋나게 설정된것은 고려시기에 건설된 두 왕궁건축의 평면구성에서 일치되는 공통점이며 또 고려시기의 왕궁건축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고려의 왕궁터들인 대화궁터와 만월대와의 호상관계에서는 다음으로 매 축대들의 우에 독자적인 건축터들이 놓여있는것, 개별적인 건물터들의 평면짜임새가 중심건물에 나래채가 붙은 형식를 이루고있는것 등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이와 함께 고려의 왕궁터들인 대화궁터와 만월대에서는 매 건축터들이 회랑으로 둘러막혀있고 일부 건축터들에는 여러개의 련결회랑, 보조회랑들이 설치되여있다.
궁전건물터의 남쪽 마당부분에 남북방향으로 련결회랑들을 설치한것은 고구려시기의 궁전건축에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특이한 형식이다.
때문에 도서《고려의 왕궁-대화궁유적》에서는 만월대의 회경전터에 동, 서, 남, 북 네면으로 회랑들이 설치되여있었고 장화전터와 원덕전터에 남쪽과 동쪽, 서쪽에 회랑터들이 있지만 여기에는 대화궁유적의 제1궁전구역 2호건축터와 제2궁전구역 1호건축터에서 발견된 련결회랑들이 없으며 이것은 고려시기 왕궁건축에서 련결회랑들은 12세기전반기 대화궁건설당시에 처음으로 도입된 궁전건축의 새로운 양상이라는것을 말하여준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만월대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 서부건축군의 일부 건물터들에서 대화궁터의 련결회랑과 같은 형식의 회랑터들이 알려지고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화궁유적발굴과정에 처음으로 찾아낸 고려시기 궁전건축의 이채로운 형식이며 만월대에 대한 발굴과정에 학자들이 새롭게 밝혀낸 귀중한 연구성과라고 말할수 있다
고려의 왕궁터들인 대화궁터와 만월대에서는 이밖에도 궁전건축의 요소들마다에서 서로 같은 모습들이 대단히 많으며 이러한 공통점들은 만월대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에서 중요한 대비자료가 된다.
반만년의 우리 민족사와 우수한 문화전통을 지키고 세상에 긍지높이떨쳐나가는것은 오늘 력사학자들, 고고학자들, 민족문화유산보호부문일군들이 나라와 민족앞에, 력사앞에 지닌 신성한 의무이다.
우리는 대화궁유적발굴과정에 얻은 성과와 경험에 토대하여 만월대유적을 비롯한 고려시기의 력사유적들에 대한 발굴사업에 적극 참가하여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빛내이는데 적극 기여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