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대일본에 미친 조선의 영향 (2)

 2016.5.12.

조선사람들에 의한 농경문화의 보급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일본렬도에 적극 진출하여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정일선집》 제7권 164페지)

기원전4-3세기경 일본서부지방에 대한 대량적으로 진출로 그곳에 정착한 조선사람들은 우수하고 발전된 농경문화를 처음으로 일본렬도에 보급하였다.

일본원주민들은 야요이문화시기 이전인 죠몽문화시기까지도 사냥한 짐승이나 물고기, 조개류 그리고 나무열매 등을 먹으며 살았으며 농사짓는 법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이렇게 수렵, 채집과 같은 원시적인 생산활동단계에 있던 일본렬도에 죠몽말기~야요이초기경부터 갑자기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발전된 농경문화가 조선과 가까운 북규슈지방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서는 북규슈지방의 후꾸오까현 이다쯔께유적과 사가현 나바다께유적, 세또이나해연안의 오까야마현 쯔시마유적, 기나이지방의 오사까부 무레유적 등인데 이 유적들에서는 논농사를 짓던 논판들과 거기에 물을 대주던 수로자리 그리고 벼알, 농구 등이 발견되였다.

아직 사냥과 채집, 물고기잡이와 같은 원시적인 생산활동밖에 모르던 일본에 갑자기 발전된 높은 형태의 영농공정을 요구하는 논농사가 도입되였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일본원주민들이 독자적으로 창조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면 발전된 농경문화를 보급한것은 누구였겠는가.

그것은 문화발전수준상 차이로 보나 지리적위치로 보나 바로 다름아닌 고대 우리 조선사람들이였다.

신석기시대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한 우리 선조들은 B.C.4 000년기 후반기부터 벼농사를 지었으며 농구와 영농방법을 크게 개선하고 축력을 널리 리용하여 농업생산에서 로동생산능률과 토지리용률을 훨씬 높이고 알곡생산을 늘이였다.

오랜 농사경험과 기술을 가지고있던 우리 선조들은 고대말기에 일본에 건너가서 고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그 과정에 점차 농경문화를 보급하였던것이다.

일본의 농경문화가 조선에서 넘어간것이라는것은 이 시기 유적들에서 나온 벼알과 목재공구, 질그릇, 석기 등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벼알은 일반적으로 생김새에 따라 두가지로 나눈다. 길이가 너비의 두배이상되는것은 긴알형, 그렇지 못한것은 짧은알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본 일본의 유적들에서 나온것은 모두 짧은알형이다. 이것은 일본보다 훨씬 오래전의 유적들인 우리 나라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의 남경유적, 경기도 려주군 흔암리유적,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유적들에서 나온 짧은 알형의 벼알과 일치하다.

죠몽말기~야요이초기 농경문화유적들에서 나온 질그릇과 석기 갖춤새도 마찬가지이다. 질그릇은 갈색민그릇과 화분형질그릇형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고대조선에서 쓰인 갈색민그릇이 우세하다. 그리고 반달칼, 끌, 오목자귀, 돌단검 등 석기들도 고대조선의것과 그 생김새가 같은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야요이시기 일본의 농경문화가 우리 조선사람들이 일본렬도에로의 진출과 문화적영향에 의하여 시작되였다는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일본말에서 《벼》를 《이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목숨의 근원이라는 어원적뜻을 가지고있다. 말하자면 풀뿌리나 나무열매같은것으로 살아가던 일본원주민들이 우리 나라에서 전파된 벼를 알게 되면서 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고 밥을 먹게 된것이 자기들의 생명, 목숨을 빈궁과 죽음에서 건져준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인것이다.

고대조선사람들은 벼농사와 함께 조를 비롯한 밭농사도 보급하였다. 일본에서 출판된 《바다를 건너온 사람과 문화》라는 책에서는 야요이문화시기 고대조선사람들은 논농사와 함께 밭농사도 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야요이문화시기 우리 선조들이 일본렬도에 진출하여 농경문화를 보급한것은 일본력사발전에서 하나의 큰 사변이였다. 그것은 갈대무성한 고대일본땅에 처음으로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려 알곡을 수확하는 농업이 발생하여 사회적생산량이 훨씬 늘어나게 되였고 주민들의 식생활에서는 알곡을 주식으로 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