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빛나는 예지로 찾아주신 고구려 시조왕릉

 2015.9.8.

고구려시조 동명왕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60리가량 떨어진 력포구역 룡산리의 울창한 소나무숲에 자리잡고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아름다운 금잔디로 단장한 송림속의 이 무덤을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왕묘》로 불렀고 이 부근을 왕릉동이라고 하였다.

민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뿐아니라 《고려사》,《동국여지승람》, 조선봉건왕조실록을 비롯한 우리 나라 중세력사책들에도 고구려의 시조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중화지경안의 룡산땅에 있으며 동명왕을 숭배하는 제사의식도 진행되였다는 기록이 있다.(《동국여지승람》 권52 중화군 릉묘, 《세종실록》지리지 권 154 평안도 평양부, 《숙종실록》 권3)

이 무덤의 주인공인 동명왕은 B.C, 277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강력한 봉건국가인 고구려를 세운 시조왕이다.

고주몽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강대한 봉건국가로 만들었다.

고구려시기에는 국력이 강하였기때문에 그 어떤 외래세력도 감히 범접을 못하였고 큰 나라를 섬기거나 숭배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라는 광대한 령토에서 용감성과 애국심을 발휘하여 외적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근면한 로동과 지혜로 찬란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한 통치로 하여 국력이 점차 약해지고 우리 나라가 외래침략자들에 의하여 롱락됨에 따라 민족의 자랑인 동명왕릉까지도 허위와 외곡의 장막속에 가리워 무시당하게 되였다.

지난날 일제와 반동어용사가들은 동명왕은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 전설적인 인물이며 동명왕릉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외곡된 력사적사실은 해방후에도 반당종파분자들과 사대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바로 잡히지 못하였으며 왕묘의 주인공이 동명왕인가, 아닌가 하는것을 가지고 우리 나라 력사학계에서도 여러가지 론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동명왕이 평양에 묻힐수 없다는 주장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주장은 동명왕이 환인(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중류 류역, 오늘의 중국료녕성 환인현에 있음) 에 첫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국가를 세운후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으며 그후 오랜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도 고구려가 집안(압록강의 중류 오늘의 자강도 만포시의 맞은편에 있음)에 두번째 수도를 정하였고 세번째로 427년에야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였는데 어떻게 평양에 그의 묘가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우리 나라의 고고학자들은 력사기록에 있는 사실을 확증하려고 발굴조사사업을 시도해보았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버림받아왔고 일제에게 도굴당한 무덤이고 보니 동명왕릉이라고 확증할만한 가치있는 유물을 찾지 못하였다.

동명왕릉문제는 력사의 짙은 안개속에 파묻혀 풀수 없는 과제로 남게 되였으며 시간이 감에 따라 그것은 학계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까지 되였다.

이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깊숙이 잠겼던 력사적사실을 천리혜안의 예지로 밝혀내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의 진실을 밝히는것을 단순히 왕릉의 주인공을 밝히는 문제로만 보시지 않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문제를 외래침략자들과 사대주의자, 민족허무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당하고 외곡되여온 우리 나라의 력사를 바로 잡는가 아니면 력사의 한 부분을 잃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왕릉의 주인공문제를 단순히 과학리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과 결부시켜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제인가 기록영화에서 재일동포들이 귀국하는 장면을 보신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조국의 품에 안기는 귀국동포들의 극적인 상봉장면이 비껴가는 가운데 부모의 유골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동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장면을 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몹시 대견해하시면서 자 보시오, 조선사람들은 저렇게 이역만리에서도 자기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 오지 않는가, 하물며 강대했던 고구려사람들이 자기의 건국시조의 묘를 버리고 올수 있겠는가고 확신에 넘치시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는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면 부모의 유해를 함께 옮겨가는 풍습이 있습니다. 동명왕은 고구려시조왕이므로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유해를 옮겨오지 않을리 없는것입니다. 》(《김일성전집》 제53권 512페지)

많은 사람들, 특히 력사학자들도 이 기록영화를 보았지만 누구나가 다 무심히 스쳐보낸 하나의 장면을 보시고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륜리도덕에 대하여 알려주시며 력사유적해명의 실마리를 틀어쥐시는 분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물질적인 문헌기록과 유적유물만을 중시하던 당시에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을 결부하여 보아야 한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연구원칙의 발견이였으며 고고학과 력사연구에서 틀어쥐고나가야 할 주체적방법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기초하여 룡산리의 무덤을 고구려의 시조왕릉 동명왕릉이라고 확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빛나는 예지와 과학적통찰력은 그후 동명왕릉 발굴사업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되였다.

왕릉에서는 련꽃무늬벽화가 드러났고 고구려시기에 금, 은으로 만든 100여개의 왕관잔편들과 구슬 등 진귀한 유물을 찾아냈으며 왕릉앞에서는 3만m2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절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절이 동명왕을 위하여 지은 절이라는것을 증명하는 《정릉》, 《릉사》라는 글이 새겨진 고구려시기 질그릇까지 발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빛나는 예지에 의하여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무덤이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왕릉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거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제일 강하였던 때는 고구려시기였으며 고구려는 동방의 대강국으로서 만방에 그 위력을 떨치였다고 하시면서 동명왕릉을 잘 꾸릴데 대하여 여러차례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구려시조왕릉인 동명왕릉을 잘 꾸리고 고구려력사를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무려 15차례나 왕릉을 찾으시였으며 300여차례의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

오늘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보살피심과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고구려시조왕인 동명왕릉은 훌륭히 꾸려져 우리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이 조국의 력사를 배우며 민족적긍지와 애국주의정신을 키우는 교양장소로 되고있다.

하기에 이곳을 찾은 미국의 한 교포인사는 김일성주석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넋을 키워주시는 희세의 애국자라고 소리높이 격찬하였으며 수많은 외국의 력사학자들과 5대륙의 청년학생들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은 력사과학분야에도 깊이 관통되여있다고 하면서 조선에서 주체사상만이 아니라 주체의 력사관도 배웠다고 자기들의 진정을 터놓고있다.

참으로 고구려시조왕릉은 위대한 수령님의 빛나는 예지와 과학적인 통찰력을 떼여놓고는 생각할수 없는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