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박사 부교수 조광협
2021.8.1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녕 우리 수령님은 이민위천을 평생의 지론으로,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오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십니다. 우리 수령님처럼 인민을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시고 인민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신 수령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9권 100~101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인민에 대한 사랑을 가장 숭고한 높이에서 체현하신 우리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한평생 인민들속에 계시면서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시였으며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였다.
한평생을 오로지 인민을 위하여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헌신과 로고는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시기에 열린 경공업전람회에도 뜨겁게 깃들어있다.
주체40(1951)년 10월 23일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건지리골안에서 경공업전람회가 열리였다.
그해 2월초 평양시내에 있는 사창시장을 돌아보시면서 전시인민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전시 인민소비품수요를 보장하실 구상밑에 이르는 곳마다에서 생산합작사들을 활발히 운영하게 하시였으며 거기에서 생산된 생활필수품들을 전시하여 좋은 경험을 전국에 일반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생산합작사 중앙위원회 주최로 이 전람회를 열게 하신것이였다.
전람회장은 건지리 오리골입구에 남쪽을 향해 앉은 두칸짜리 수수한 토벽집이였다.
이날 오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과 함께 전람회장에 나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람회장 출입문으로 들어서시면서 생산합작사 중앙위원회 일군들로부터 전시된 품종과 진렬정형을 료해하시였다.
그날 전시장에는 400여종의 품종이 전시되였는데 방안 네면을 따라 각종 천류와 옷, 신발, 일용잡화, 학용품, 화장품, 식료품, 가정용품, 농기구들이 전시되여있고 매 상품들앞에는 간단한 해설문들이 놓여있었다.
먼저 편직물들이 전시된 곳으로 다가가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 편직공장들과 가정들에서 수공업적으로 만든 어른들과 어린이들의 내의, 양말, 장갑, 수건들이 진렬되여있는것을 만족하게 둘러보시였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린이내의 한벌을 들고 살펴보시며 편직물을 잘 만들었다고, 모양이 곱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만든 공장의 생산능력을 알아보시고나서 이런 편직물을 더 많이 생산하여 인민들에게 공급하여야 한다고, 지금 적들의 야수적폭격으로 매일같이 수많은 전재민들이 나오고있고 멀지 않아 겨울이 시작되겠는데 그들에게 입힐 옷이 부족하다고, 모든 예비와 가능성을 다 동원하고 조직사업을 짜고들면 편직물을 더 많이 생산할수 있을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전시장에서도 앞으로 인민들의 입는 문제를 원만히 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주시였으며 신발전시장에서는 인민들의 신발문제를 두고 걱정하시며 올해 봄에 강서군 대보면 팔청리에 나가보니 인민들이 신발도 변변히 신지 못하고있었는데 아무리 전쟁시기라고 해도 그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그래서 그곳 인민들에게 고무신과 소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을 보내주고 곧 정치위원회에서 《인민생활안정을 위한 필수품증산과 상품류통강화에 대하여》를 토의하였으며 내각결정도 채택하였다고 하시면서 모든 예비와 가능성을 다 동원하여 인민들의 신발문제를 해결할데 대하여 특히 어린이들의 신발생산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하겠다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용잡화전시장에 진렬된 곽성냥을 보시고도, 학용품전시장에서 연필 한자루를 보시고도 생산을 많이 하여 제때에 공급하여야 한다고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전람회장을 다 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든 전시품들에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앞으로 경공업과 지방공업을 더욱 발전시켜 전시인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떠나가시였다.
이렇듯 생사를 판가리하는 준엄한 전쟁속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생활문제를 놓고 언제나 마음쓰시며 그 해결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시였다.
최고사령부에서 경공업전람회가 성황리에 진행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인민적시책들이 련이어 취해졌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2월말에는 인민소비품생산을 통일적으로 조직지도할수 있게 산업성을 분리하여 중공업성과 경공업성을 조직하고 다음해 4월에는 생산합작사를 생산협동조합으로 개칭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에는 전해에 비하여 면천생산이 386%, 면실생산이 334.3%로 각각 장성하였으며 1953년에는 전반적방직공업제품이 전쟁전 수준을 훨씬 릉가하게 되였다. 또한 전시조건에 맞게 중소규모의 지방산업공장과 생산협동조합들이 급속히 정비강화되여 영예군인생산협동조합, 후방가족생산협동조합 그리고 농촌의 부업생산협동조합들이 광범히 조직됨으로써 1951년말에 이르러 협동단체공업은 그 조합수와 조합원수에 있어서 벌써 전쟁전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그 생산량도 108.7%로 늘어났다.
그처럼 가렬했던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인민소비품생산이 늘어나게 된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생활안정을 위하여 기울이신 심혈과 로고의 결과였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의 한생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사상과 령도에 구현하시여 현실로 꽃피우신 인민적수령의 숭고한 한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