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선인민은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서도 빛나는 전통을 창조한 재능있고 지혜로운 문명한 민족입니다.》 (《
지난날에 이루어진 민족문화유산은 선조들이 걸어온 오랜 력사와 그 과정에 창조된 우수한 문화를 알게 하며 오늘 우리 인민들이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는데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고전문헌 《고려고도징》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이름높았던 고려의 수도 개성에 대하여 쓴 일종의 지방지이다. 여기에는 고려시기의 력사지리와 교육, 문화, 풍속, 명승고적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고려고도징》은 한재렴(1775-1818)에 의하여 편찬되였다. 그의 자는 제원이며 호를 우화당 또는 심원당이라고 하였다. 한재렴은 개성출신의 문인으로서 이곳에서 성장하여 활동하면서 자기 고향에 대한 향토애를 가지고 이 책을 편찬하였다.
《고려고도징》은 모두 7권 3책으로서 제1권은 《국도고》와 《산수고》, 《성곽고》, 제2권은 《궁전고》, 제3권은 《공해》, 제4권은 《풍속》, 제5권은 《단묘고》와 《산릉고》, 제6권은 《태학고》, 제7권은 《사원》으로 구성되여있다. 그리고 맨 앞부분에 한재렴이 쓴 《증경회고》시 7수가 붙어있는데 이것이 서문을 대신한다.
저자는 《고려고도징》의 해당《고》들에서 그와 관련한 국내외문헌자료들을 제시하였으며 필요한 개소들에 《안설》을 안받침하여 자기의 견해를 밝혀놓았다.
《국도고》에는 수도 개성의 위치와 연혁, 행정구역의 변천과정,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갔던 사실들이 간결하게 서술되여있다. 여기에는 개성의 각이한 명칭의 유래와 918년에 세워진 고려봉건국가가 그 이듬해인 919년 1월 철원으로부터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개주라고 부른 사실, 그후 개성부를 새로 내오고 적현(수도의 직할현) 6개와 기현(수도주변의 현) 7개를 관할하도록 한것을 비롯하여 개성부의 변천과정 등이 서술되여있다.
《산수고》에서는 개성일대의 산, 강 및 저수지들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한 력사적사실들을 취급하였다. 여기에서는 송악, 자하동, 룡수산, 남산, 례성강, 벽란도, 전포, 룡화지, 증지, 대정, 다래정 등 14개 항목에 나누어 그 명칭의 유래와 자연지리적위치, 그곳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요사건이나 국가적조치, 특이한 일들에 대하여 전하고있다.
《성곽고》에는 개성성곽들의 축조경위와 그와 관련한 력사적사실들을 밝혀놓았다. 수도성인 개성성과 발어참성에 대하여 기록하였는데 특히 라성이 강감찬의 제의로 현종때 처음으로 쌓았다는것과 그 규모와 구조물들, 내성의 신축 및 수축과정이 밝혀져있으며 이 성안에 기여들어 감행한 외래침략자들의 만행과 그것을 쳐물리친 고려인민들의 투쟁사실을 전하고있다.
《궁전고》는 《총재》와 개별적인 궁전건물에 대한 자료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총재》에서는 개성에 있었던 왕궁의 명칭과 그것이 변천되여온 경위, 왕궁을 보수하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으며 왕궁건물과 관련한 기이한 자연현상들도 기록하였다. 왕궁의 주요건물들에 대한 부분에서는 회경전, 건덕전, 중광전, 봉원전, 문덕전, 청연각, 림천각, 옥촉정, 상춘정, 산호정, 사루, 장경궁, 수창궁, 화원 등 23개에 달하는 건물들의 위치와 건축구조, 규모, 양식과 함께 매 건물의 사명과 그곳에서 벌어진 력사적사실, 각종 의식같은것을 기록하였다.
《공해》에는 순천관, 객관, 교역, 교량 등 14개의 항목아래 영빈관, 청하관 등 외국상인들을 접대하고 대외무역을 진행하던 관사들, 개성의 시가지와 교통 등과 관련한 기사들이 실려있다.
《풍속》에는 고려시기에 널리 진행되던 팔관회, 연등회 등의 행사와 함께 격구, 석전, 그네뛰기와 같은 민속놀이, 의복제도, 고유한 음식풍속, 놋그릇을 많이 쓰는 풍속 등의 자료들이 반영되여있다.
《단묘고》에서는 사직, 종묘 등 봉건왕실제사에 대한 기사들을 실었고 《산릉고》에서는 고려 력대왕(우왕, 창왕은 제외)들과 일부 왕족들을 포함한 35개 릉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태학고》에서는 고려시기의 국가교육기관인 국자감의 건립과정과 경영상태, 교육방법 그리고 서적구입과 과거시험실태에 대하여 쓰고 부록으로 최충이 창설한 사립학교인 9재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사원》에서는 개성에 70개의 불교사원이 집중되여있던 사실을 전하면서 법왕사, 왕륜사를 비롯한 근 60개에 달하는 불교사원들의 위치, 건립년대 및 그와 관련한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고려고도징》은 고려력대에 걸쳐 개성과 그 부근일대에 관한 지형, 유적유물, 풍속 등을 부분별로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고려고도징》은 중세 문헌편찬사에서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며 참고할만 한 가치를 가진다.
《고려고도징》이 가지는 사료적가치는 첫째로, 19세기초까지 개성의 력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모아엮은 대표적사료라는데 있다.
개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 실려 전해오지만 각기 특징을 가지고있다.
《고려사》는 139권으로 된 정사체의 단대사로서 고려 475년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각 분야의 자료를 포괄적으로 담고있으므로 개성의 력사와 문화를 부분별로, 요점적으로 리해하는데는 부족하거나 불편한 점들이 없지 않다.
개성지방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다룬 문헌으로서는 리덕형(1561-1613)이 쓴 《송도기이》(1권)를 들수 있는데 이것은 개성지방의 특이한 력사적사실을 주로 문학적으로 취급한 수필집이였다.
1649년에 개성류수였던 김육이 편찬한 《송도지》(3권)는 개성지방의 읍지로서는 처음으로 되는것이였으나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김육의 《송도지》이후에도 개성에 대하여 쓴 책들이 편찬되였을것이나 현재 남아있는 문헌으로서는 《고려고도징》이 그 다음이다.
한재렴도 자기의 저서인 《고려고도징》에서 잠곡(김육의 호)의 《송도지》를 《송도구지》라고 인용한바 있다. 《송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고도징》을 편찬하게 되였던것은 《송도지》가 편찬체계나 내용에 있어서 개성에 대한 자료를 충분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였기때문일것이다.
그후 1824년에 개성류수 김리재가 김육의 《송도지》를 보충하여 《중경지》(일명 《송도지》라고 함, 11권)를 편찬함으로써 개성읍지로서의 완성을 보았다고 할수 있다.
《고려고도징》은 《중경지》가 나오기이전의 문헌들가운데서 개성의 력사와 문화를 중점으로 리해할수 있게 편찬된 대표적인 문헌으로 인정된다.
한재렴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연혁과 주요 산과 강, 방어시설의 하나인 성곽, 고려시기의 관청건물, 교육기관, 왕릉과 사찰 등의 유적들과 풍속과 관련한 내용들가운데서 중요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되는것들을 모아 항목별로 제시함으로써 당시 개성일대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려고 하였던것이다.
《산수고》에 서술된 12세기의 이름난 화가 리녕의 《례성강도》가 유명한 그림으로 알려지게 된 사연, 《례성강곡》이 창작된 유래, 특히 례성강어구에 위치해있던 벽란도와 전포에 대한것은 고려시기에 해상교통의 거점이였던 이 항구들을 거쳐 당시 대외무역과 대외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있었던 모습을 엿볼수 있게 한다.
《성곽고》에는 개성의 라성(외성)이 연 30만 4 400명의 장정로력으로 20여년의 오랜 시일을 거쳐 완성되였다는것과 둘레 2만 9 700보나 되는 이 성에 부속건물로 1만 3 000간이나 되는 다락집들이 있었다는것이 밝혀져있다.
《궁전고》에서 1138년 개성에 있었던 궁전들과 다락, 문 등의 왕궁소속건물들 60여개를 총괄하여 소개하면서 그중 대표적인것들을 따로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준것, 교량의 항목을 설정하고 교통수단의 하나였던 다리에 대하여서도 락타교, 선죽교, 십천교를 비롯한 11개의 다리에 대한 자료를 일목료연하게 모아놓은것 등도 그 대표적실례이다. 왕릉이나 사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고려시기의 력사적사실들가운데서 중요하고 특이한것으로서 당시의 대외무역과 성곽, 궁전, 사찰을 비롯한 건축물들의 연혁과 형식, 기술을 연구하는데 참고로 된다.
《고려고도징》이 가지는 사료적가치는 둘째로, 우리 나라 중세말기 고증학의 발전정형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우리 나라에서 옛 문헌들의 자료를 고증하는 사업은 이미전부터 진행되여왔으나 그것이 학문적성격을 띠고 본격화된것은 17세기 실학의 발생이후부터이다.
특히 봉건사회말기에 이르러 진보적인 학자들속에서 실학이 성행하면서 구체적인 력사적사건, 사실과 인물, 지명 등을 연구하여 잘못된것은 바로잡고 알려지지 않았던것은 새로 밝히는 고증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고려고도징》은 한재렴이 고려의 옛수도 개성의 면모에 대하여 보여주면서도 그에 대하여 쓴 이전시기의 자료를 고증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편찬한 책으로서 이 문헌의 제목은 이 문헌의 편찬목적을 뚜렷이 알수 있게 한다. 《고려고도징》에서 《징》은 곧 《고증》과 같은 의미이다. 때문에 《고려고도징》에는 해당 개소들에 저자의 견해와 주장을 밝힌 《안설》이 붙어있다.
한재렴의 《안설》이 오늘의 시점에서 다 옳은것이라고 볼수 없지만 이러한 고증방법을 리용한것은 한재렴의 학문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와 견해를 보여준다.
한재렴은 《고려고도징》의 《안설》에서 력사적사실, 년대, 지명 등에 대한 자료고증을 진행하였다.
그중 몇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사원》항목에 들어있는 《감로사》에서는 고려의 리자연이 원나라에 간 사실이 있었다는 《무몽원집》의 자료가 《동국여지승람》에 실린것과 같다고 하면서 리자연은 문종(재위 1047-1083)때 사람이므로 엄청난 오유라고 지적하였다. 이밖에 《개국사》에서는 《익재란고》에서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쓰면서 년대를 잘못 기록한것을 고려왕조의 년대로 바로잡아놓았다.
《산수고》항목에 들어있는 《전포》에서는 당나라 숙종이 개성에 와서 노닐었다는 설과 그것이 숙종이 아니라 선종이였다고 한 고려 민지의 설도 근거없는것이라고 부인하였다.
《궁전고》에서는 《동국여지승람》에 왕궁을 총칭 연경궁이라고 한것과 건덕전을 정전이라고 한것은 다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오유라고 하면서 회경전이 바로 정전이라고 고증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고려시기 력사에 나오는 지명이나 건물의 명칭, 그리고 고려시기에 있었던 력사적사실과 그 년대같은것을 리해하는데 참고로 되는 동시에 《고려고도징》의 문헌적가치를 부각시켜주며 당시 우리 나라 문헌편찬의 발전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고도징》에는 일련의 제한성과 부족점도 있다.
우선 이 문헌에는 사대주의적요소가 적지 않다.
저자가 자료를 다루면서 국내기록들을 우선시하고 거기에 다른 나라의 문헌들을 보충하는 방향에서 서술하여야 하겠으나 일부 편목들의 앞머리에서 외국기록들을 먼저 인용하고 국내기록들을 그 다음에 놓았으며 내용서술에서도 다른 나라의 기록들을 비판적으로 대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한것과 같은것들이 적지 않게 반영되여있다.
또한 이 문헌의 내용에 미신적이며 비과학적인 지리풍수설들이 들어있다.
이밖에 근로인민대중을 기본으로가 아니라 봉건국왕을 중심으로 자료를 서술하거나 체계가 정연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비슷한것들이 섞인것들도 있으므로 이런 점들은 비판적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고려고도징》은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봉건국가의 정치경제적, 군사적 및 사상문화적중심지로서의 개성의 옛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19세기초 고증학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책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