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침략자들은 력사적으로 끊임없이 우리 나라를 침공하여왔으나 한번도 우리 인민의 애국적충성심과 용감성을 꺾지 못하였으며 우리 인민을 굴복시킬수 없었습니다.》 (
슬기롭고 용감한 우리 인민들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켜 자랑찬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조선인민은 력사적으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을 발휘한 애국정신이 강한 민족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 나라 금석문들에도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주의정신이 반영된 자료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어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사를 폭넓게 리해할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 금석문인 비석들에 반영된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투쟁자료들에 대하여 간단히 밝혀보려고 한다.
우리 나라 금석문들에는 무엇보다먼저 임진조국전쟁시기(1592~1598년)에 왜적의 침략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우리 인민의 애국적투쟁자료들이 반영되여있다.
왜적들에 의하여 강요된 임진조국전쟁은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을 가져다주었으며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엄중히 위협하였다.
우리 나라에 대하여 호심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던 왜적들은 1592년 4월 수십만의 대병력으로 불의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우리 나라의 넓은 지역을 강점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 한사람같이 일떠선 애국적인민들은 도처에서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으며 왜적과의 싸움에서 자기의 한목숨 기꺼이 바쳤다.
우리 인민의 이러한 애국투쟁을 반영한 금석문들로서는 《연성대첩비》(1608년, 연안군 읍에 세움), 《북관대첩비》(1708년, 김책시 림명리에 세움), 《서관삼진의렬비》(1732년, 중화군 읍에 세움), 《창렬사유허비》(1879년, 어랑군 무계리에 세움), 《숭렬서원유허비》(1885년, 청진시 청암구역 직하리에 세움), 《김덕령묘비》(화대군 송동리에 세움), 《리희건묘비》(화대군 무수단리에 세움) 등을 들수있다.
《연성대첩비》는 1608년에 리정암(1541~1600년)을 비롯한 연안성인민들의 공적을 오래도록 전하기 위하여 당시 좌의정이였던 리항복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는 1592년 8월 28일 연안성으로 달려든 3 000여명의 왜적을 연안성의 애국적군민들이 쳐물리친 사실에 대하여 전하고있다.
비문에는 《의병장 리정암이 백성들과 사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 정암이 사람들에게 〈성이 함락된 다음에 성에서 나가자면 어려울것이니 두려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당장 마음대로 성을 나가도록 하라.〉라고 하니 모든 군민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고 하였다.》고 씌여있다.
이것은 당시 연안성의 애국적군민들이 한사람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일떠섰기때문에 성을 지켜낼수 있었으며 적들로 하여금 종당에 포위를 풀고 많은 시체를 남긴채 쫒겨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정문부를 비롯한 함경도지방 의병들이 우리 나라에 기여든 왜적들을 쳐물리치고 큰 승리를 이룩한 력사적사실을 기록하여 세운 기공비이다.
비문에서는 정문부의병대의 투쟁활동과 혁혁한 전과를 자랑스럽게 기록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592년 11월부터 의병부대들은 가파, 백탑, 석성, 림명 등에 주둔하고있으면서 매복전과 기습전으로 왜적을 물리쳤으며 12월과 이듬해 정월 의병부대는 쌍포, 단천 등지에서 적들을 격파하고 다시 길주, 백탑에서 적들을 격멸함으로써 왜적이 다시는 마천령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비문에는 의병대의 승리가 혁혁하였으나 당시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들의 질투와 시기때문에 정문부는 응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7세기 중엽 현종(1660~1675년)때에 이르러 다시 론의되면서 그들의 벼슬을 추증하게 되였고 어랑에 《창렬사》라는 사당을 세워 추모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비문을 통하여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워온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내용과 극도로 부패타락하였던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을 알수 있다.
《서관삼진의렬비》에는 수백여명의 애국적인민들이 의병장 림중량의 지휘밑에 1592년 중화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진》에 성을 쌓아 놓고 병쟁기를 자체로 만들어 왜적과 끝까지 싸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였다.
《서진》은 중화에 《동진》이 있었기때문에 고을 서쪽 20리에 둘레가 3리쯤되는 성을 쌓고 《서진》이라 하였다.
비문에는 의병들이 적들의 포위를 뚫고나가면 얼마든지 살아날수도 있었으나 그 누구도 제 한목숨만을 생각하지 않고 성이 함락되는 마지막순간까지 왜적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데 대하여 상세히 수록하였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윤붕의 수하 군관이 윤붕에게 어둠을 타서 성을 빠져나가 몸을 피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붕은 칼을 뽑아들고 꾸짖기를 〈남들과 같이 죽자고 약속하였는데 나만 살란 말이냐? 다시 이런 말을 하는자는 목을 베겠다!〉라고 말하고는 몸을 날려 적을 쳤다.》고 기록되여있다.
또한 비문에는 《성이 함락되던 때 누가 윤은형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였더니 은형은 성이 나서 〈나는 이미 한목숨을 나라에 바친 몸이니 어떻게 성을 버리고 살기를 꾀한단 말이냐?〉라고 하며 주먹을 부르쥐고 나가 적을 족쳤다.》고 기록되여있다.
비문에는 이밖에도 성안에 있던 김덕렴이라는 사람은 집에 잠간 나왔다가 성이 장차 함락당할것 같다는 소식을 듣자 옷깃을 잡으며 말리는 안해를 뿌리쳐 버리고 문을 나서며《내가 벗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약속하였는데 어떻게 아낙네의 말을 듣고 그것을 저버린단 말이냐?》하고는 성으로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왜적들과 싸우다가 성과 운명하였다는 사실도 전하고있다.
서진성에서 싸운 의병들의 공적에 대하여 봉건정부에서는 연안성에서 싸운 리정암의병대의 공적과 똑같이 평가하였다고 비문에 새겨져있다.
비문에서는 림중량의병대의 투쟁공적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였다.
《세상사람들은 평양성을 수복한것은 오직 명나라 군사들의 힘에서 나온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적병이 감히 서쪽 의주로 올라가지 못한것은 서진에 얽매였기때문이다.
적들은 대동강가에서 맴돌다가 끝내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나라를 부흥시킨 공적을 이곳 사람들의 몫으로 돌린다고 하여도 지나친것이 아닐것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중화지방인민들은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타격하였으므로 왜적이 더는 전진하지 못하고 대동강가에 머물러있다가 종당에는 쫒겨 달아나게 되였던것이다.
《김덕령묘비》에는 왜적들이 임진, 계사년 (1592, 1593년)에 북쪽지방을 짓밟게 되였을 때 왜적들을 유인하여 쳐부신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있다.
비문에서는 적 수천명이 명천지방에 로략질을 하면서 장차 길주로 넘어와 두 고을을 타고앉으려 할 때 두 고을사이에 있는 《장덕》이라는 큰 고개로 적들을 유인하여 외통길에서 왜적들을 모조리 절벽밑으로 떨어뜨려 죽인 사실자료들을 전하고있다.
김덕령은 그때 《향사》의 직임을 맡고있었다. 《향사》는 지방의 한량들이 모여 활쏘기재주를 겨루는 모임이였다.
《창렬사유허비》, 《숭렬사유허비》에는 정문부를 비롯한 의병들의 투쟁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비문에는 의병장들인 정문부, 리붕수 뿐아니라 원희, 김권, 박근, 차덕흥, 차응린, 박인범, 박례범 등 력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자료들도 수록되여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로서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마을을 지켜 적들과 한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다.
《리희묘비》에는 장수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의병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제 목숨을 건질 생각만 하면서 쥐새끼처럼 도망쳐 조정에서 맡은 군사임무조차 망쳐버린데 대하여 조소하고있다.
《리지시신도비》는 1592년 6월 5일 리지시, 리지혜형제가 왜적의 침입을 반대하여 싸우다 운명한 사실을 기록하고있다.
전쟁당시 조방장이였던 리지시는 순찰사 리광의 휘하에서 싸웠는데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였다.
비문에는《늙은 종인 수한이 옷을 가져다 지시에게 주면서 밤에 몰래 빠져나가라고 하니 〈장수는 북소리를 들으면서 죽는것이 직분이로다.
구차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백주에 달아날 노릇이지 하필이면 밤에 피하라고 하느냐?〉하고는 적들과 온밤 싸우다가 다른 군사들과 함께 운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의 침략을 막아 싸운 우리 인민의 애국심은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고향마을과 부모처자에 대한 사랑과 조국강토와 자기 민족에 대한 애착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사상감정이였다,
비문들에 실린 반침략애국투쟁에 대한 자료들은 우리 인민이 자기 조국과 자기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지녔기에 원쑤와 맞서 한목숨 기꺼이 바칠수 있었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비문들에 수록된 평범한 인물들의 투쟁에 대한 자료들은 전쟁에 대하여 기록한 다른 력사문헌들에서는 거의 찾아볼수 없는것으로서 귀중한 사료적가치를 가진다.
우리 나라 비석들에는 다음으로 후금(청)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에서 무비의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한 우리 인민들의 투쟁자료들도 반영되여있다.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투쟁은 북쪽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도 힘있게 벌어졌다.
1623년에 있은 《인조반정》이후 정권을 쥔 서인파들은 멸망해가는 명나라세력만을 믿으면서 새로 등장한 후금세력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
당시 국왕이였던 인조는 서북지방 군사지휘관들로부터 후금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으니 이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번 받았으나 누르하치를《작고 추악한 적》으로 얕보면서 후금을 홀시하고 그의 침략책동을 등한히 하였다. (《인조실록》 권5, 2년 3월 무진)
후금침략자들은 조선봉건왕조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자기들을 반대하는 기지를 제공하여주고 저들을 적대시한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붙여 1627년에 불의에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단행하였다.
1627년 1월 3만의 대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룡골산성, 릉한산성 등을 강점한 침략자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평산까지 기여들었다.
겁에 질린 봉건통치배들은 자기 목숨이나 부지해보자고 피신처를 찾아 도망쳤으나 일시적으로 강점된 지역의 인민들은 항전대오를 뭇고 의병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정봉수승전비》, 《정기수묘비》, 《삼십륙의사비》, 《리개립비》, 《오여상묘비》 등 여러 비문들에 후금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운 의병들의 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정봉수승전비》(1672년에 세움, 염주군 반곡리)에는 철산지방인민들이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추천하고 당시 중요한 군사적요충지였던 룡골산성에 들어가 용감히 싸워 이긴 사실이 반영되여있다.
한편 정기수, 정학수묘비들에도 정봉수를 비롯한 평안도지방인민들이 룡천, 의주, 철산 등지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반역자 장사준을 처단한 후에 달려드는 적들을 맞받아 싸워 많은 무기와 말들을 로획한 사실이 반영되여있다.
또한 《삼십륙의사비》(평안북도 염주군 반곡리에 세움)에는 후금의 침입을 반대한 소위포 의병장 리립과 그의 일가 사람들인 36명의 의병들이 벌린 투쟁사실을 기록하였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였다.
《아!정묘년(1627년)에 건주위의 오랑캐들이 정예로운 군사를 다 몰아가지고 와서 장차 우리 팔도강산을 유린하려 하였다. 오랑캐들은 겨우 변경에 접어들었다가 기세가 꺾이고 리씨네의 의로운 칼날에 넋을 잃었다. 이런 까닭에 적들은 남쪽으로 강을 건늘수 없었다.
만약 리씨네가 없었다면 미친듯한 기세를 막아낼수 없었을것이니 남한산성의 치욕이 병자년에 있지 않고 정묘년에 있게 되였을지 어찌 알았으랴.》고 하였다.
비문에 기록되여있는바와 같이 후금침략자들이 달려들자 리립의 일가친척 36명은 적의 공격을 막아 싸웠다.
청나라침략자들의 침입을 물리쳐 싸운 사실은 《림경업유적비》(1872년 의주군 읍에 세움), 《오여상묘비》(1883년 배천군 일곡리에 세움)에서도 전해지고있다.
《림경업유적비》의 비문은 17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사람인 송시렬의 글에 기초하여 씌여진것인데 여기에서는 청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애써 노력한 림경업의 공적과 나라방비에 무관심한 당시 봉건통치배들의 죄상을 폭로단죄하고있다.
림경업은 정묘년에 조정이 후금과 《화의》를 맺었다는것을 알게 되자 《나에게 정예로운 보병 4만명만 달라. 그러면 장차 저놈들의 소굴을 짓뭉개고 나서 압록강에 칼을 씻고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분격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후금의 1차침입이후 서북변방에서 방어사,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놈들의 재침기도를 미리 알고 봉건정부에 대책을 세울것을 요구하였으며 많은 군사들과 인민들을 동원하여 백마산성을 비롯한 여러 성들의 성첩과 해자를 보수중축하고 병쟁기와 군량을 쌓아 빈틈없는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비문에는 또한 림경업의 높은 애국충정을 높이 찬양하였을뿐아니라 서북지방을 무방비상태로 놓아두었던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성을 일정하게 비판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림경업이 여러해동안 변방을 맡고있으면서 청나라 형편을 자세히 알게 되여 조정에 통고하기를 《오랑캐들이 비록 강화를 맺었다고는 하나 반드시 흠집을 만들어 침략할것이다. 만명의 군사가 아니면 막아낼수 없다.》고 하였더니 봉건조정에서는 《비겁하다.》고 하였다.
또 림경업이 《오랑캐가 남쪽으로 밀려들어올 날이 두어해가 지나지 않아 있을것이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바위로 막으라.》고 하였다.
비문의 이와 같은 기록들을 통하여 당시 무능하고 부패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처사를 일정하게 리해할수 있게 한다.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으로 하여 청나라침략세력은 1636년에 또다시 우리 나라를 침입하여 서북지방의 중요한 요새들을 손쉽게 통과하여 기여들게 되였다.
《림경업유적비》는 병자호란 (1636년)전시기까지의 서북방정세와 청나라에 대한 봉건정부의 정책, 그리고 청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인민들의 투쟁일단을 전하여준다.
《오여상묘비》의 비문에는 청나라침략자들의 침입을 반대하여 싸운 사실을 상세히 전해주고있다.
비문은 19세기말~20세기초 반일의병장이였던 면암 최익현이 쓴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1636년 12월 청나라침략자들이 쳐들어오자 오여상은 고향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장수성아래에서 적 70여놈을 살상하였는데 이 사실을 당시 감사였던 리배원이 나라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도망쳤기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비석들을 통하여 후금(청)침략자들을 물리쳐 용감히 싸운 우리 인민의 높은 애국심을 엿볼수 있으며 반면에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을 일정하게 리해할수 있게 해준다.
이밖에도 비석들에서는 력사적으로 우리 나라에 침입한 외적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우리 인민들의 투쟁자료들이 일정하게 반영되여있다.
우리 인민의 애국투쟁에 대하여 기록한 비석들에는 임진조국전쟁과 정묘, 병자호란시기 뿐아니라 북쪽에서 수시로 달려드는 녀진족의 침입을 물리치는 힘겨운 투쟁에서 공훈을 세운 애국적인물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비석들로서는 16세기 6차례의 녀진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신립의 공적을 기록한 《신립비》(온성군 온성읍 1722년에 세움), 리순신의 공적을 기록한 《승전대비》(선봉군 조산리 1792년에 세움) 등을 들수 있다.
《신립비》는 16세기 녀진족의 침입을 물리쳐 싸운 신립의 공적을 찬양하여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는 1583년 2월과 5월 녀진족이 불순한 기도를 드러내보이자 온성부사였던 신립이 군사를 거느리고 녀진의 소굴을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준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여기가 신장군이 싸우던 곳이다.〉고 말하며 서로 경의를 표하고 물러선다. 지금 공이 생존하던 때부터 수백년이 지났으나 그 위엄있는 명성과 열화같은 기백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놀라게 하니 어찌 그리도 장하던가.》
《승전대비》에서는 리순신이 조산만호로 있을 때 두만강변에 침입하여 로략질을 일삼던 녀진족의 침입을 쳐물리친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전하여준다. 비문에서는 리순신이 42살 나던 1586년에 둔전의 낟알이 여물자 녀진인들이 무리로 기여들어와 목책을 에워싸고 마구 로략질하나 사람들은 해마다 감행되는 로략질이라 어쩔바를 모르고 근심하고있을 때 리순신이 계책을 내여 적들을 모조리 쳐부신 사실이 기록되여있다.
후세에 이곳 사람들은 당시에 싸움이 벌어졌던 봉우리를 《승전대》라고 이름을 짓고 그곳에 비석을 세워 리순신과 그 군사들의 공적을 전하였다.
이밖에도 15세기 함경도제찰사로서 성을 쌓고 둔전을 설치하여 6진지방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기여한 《황보인추모비》, 자기의 록봉으로써 쌀, 소금, 장 등을 마련하여 검산성을 보수하고 군량을 저축한 사실을 기록한 《김사익비》, 그리고 17세기초 단신으로 많은 군량을 마련하였으며 승병 4천여명을 거느리고 안주성을 지킨 묘향산 보현사의 중인 《허백당의 탑비》 등 많은 비문들에서 각계각층 인민들의 애국적열의를 잘 반영하고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 나라 비석들에는 중세 우리 인민이 수시로 달려드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한 반침략애국투쟁자료들을 수많이 수록하고있어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사연구에 의의가 있을뿐아니라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으로서 우리 군대와 인민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더 한층 북돋아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