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침상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은 불굴의 투사

 2024.3.2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외형상으로 수더분하게 보이는 이 박달이야말로 속대가 바로선 사람이였고 허식이나 겉치레를 모르는 솔직하고 소탈하고 성실한 인간이였다.》

박달동지가 서대문형무소를 나선것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였다.

감옥문을 나섰으나 일제교형리들에 의해 투사의 육체는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일제교형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

살인귀들의 고문에 의해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지만 투사의 넋은 변하지도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철석같은 의지를 지닌 박달동지를 굴복시킬수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가 증거부족으로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박달동지는 불구의 몸으로 우리의 후대들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옥고를 치르며 7~8년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해방후 박달동지가 살아서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보내시여 그를 평양으로 데려오게 하시였다.

이전날에는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기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나이여서 본명(박문상)보다 박달로 불리운 투사는 하반신이 마비되고 뼈만 앙상한 불구의 몸으로 남의 등에 업혀 위대한 수령님앞에 나타났다.

박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다시 만났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리 구해놓으시였던 록용과 희귀한 보약들을 내놓으시며 이것을 가져다 써보고 효과가 있으면 계속 쓰도록 하자고, 이제부터 있는 정성을 다해서 박달동무의 병을 고쳐보자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동지의 병상태를 면밀히 진단하도록 하시였다. 박달동지를 진찰한 의사들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진단을 내리였다.

의사들가운데는 구원할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한명도 없었다. 박달동지는 감옥문을 나설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랑하는 전사를 위해 자신께서 하실수 있는 일은 다하시였다.

자신의 저택옆에 박달동지의 집을 잡아주시고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시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가실 때마다 문병을 하군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로 바쁘신 속에서도 남포 우산장(당시)에 젖소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 젖소를 가져다가 우유를 짜서 박달동지에게 공급하도록 하시고 전후에는 경성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내오고 치료해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동지가 경성에서 료양생활을 할 때마다 유능한 의사와 약들도 보내주시고 비행기로 도마도, 쑥갓을 비롯한 갖가지 남새들과 유명한 약수까지 보내주시며 온갖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속에 치료를 받으면서 박달동지는 《빨리 병을 고치고 장군님을 도와드려야겠는데…》하면서 늘 걱정하였다.

박달동지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에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심려를 한가지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마음썼다.

주체38(1949)년 어느날.

우산장휴양소에서 료양생활을 하고있던 박달동지는 주변농촌의 과수원들에서 사과에 봉투를 씌우지 않아 병충해를 입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는 당시 휴양소에 와있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 휴양소직원들을 발동하여 사과봉투를 만드는 일을 조직하였으며 자신도 침상에 누워 가슴에 널판자를 놓고 봉투를 만들었다.

전후 경성에서 치료받고있던 박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삼륜차를 타고 주변농촌에 나갔다가 당에서 심으라는 벼종자를 심지 않아 벼이삭에 쭉정이가 많이 생겼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달동지는 쭉정이가 많은 벼이삭을 넣은 봉투와 함께 당의 농업정책이 정확히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보고를 받으시고 어느한 회의에서 박달과 같이 불구의 몸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도 당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파서 당중앙에 보고하는데 지방일군들은 왜 그런 현상을 모르고있는가고 비판하시였다.

박달동지는 자기가 영영 일어날수 없다는것과 또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닫게 된 때부터 침상에 누워서 청소년교양에 이바지할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박달동지를 찾아가시여 그런 무리한 일은 하지 말라고 만류하시였다.

박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것은 장군님덕인데 조금이라도 혁명에 도움을 주는것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서 오래오래 살것 같다고 하면서 나는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책임자의 임무를 다 수행하지 못하고 일제경찰에게 붙잡혀서 결국 지금은 국가의 밥만 축내는 페인이 되였지만 그날에 받은 혁명임무를 마저 수행하려는 심정에서 다소나마 힘을 바치고저하니 부디 막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말씀드리였다.

박달동지는 한평생 자기의 손발이 되여주고 간호원이 되여준 충실한 안해와 의료일군들의 방조를 받으며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투사의 글줄들은 혁명전사들이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충성으로 심장을 어떻게 끓이며 투쟁해야 하는가를 보여준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어주었다.

수많은 독자들이 투사의 앞으로 독후감과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박달동지는 자기의 글이 삶의 귀중한 길동무로 되고있다는 독자들의 편지에서 고무를 받으며 여러편의 글을 연방 써냈다.

어느날 박달동지는 자를 가지고 침대를 재여가며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수자를 적은 종이장을 안해에게 내보이며 거기에 적은 치수대로 책상을 하나 짜주면 그것을 침대우에 가로건너놓고 글을 쓰겠다는것이였다.

며칠후 그가 부탁한 책상을 목수가 정성껏 짜서 보낸 책상다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박달동지는 책상을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제 좀 쉬고 이 책상을 놓고 글을 쓰겠다고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박달동지는 그 책상우에서 한번도 글을 써보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1일 새벽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충성으로 높뛰던 투사의 심장이 박동을 멈춘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동지의 집에서 력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를 여시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주체52(1963)년 량강도를 현지지도하시면서 박달동지가 해방전에 쓰던 보천군 운흥리의 집을 원상대로 복구하고 집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주시였다.

박달동지의 동상은 우리 나라에서 혁명가들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동상이였다.

박달동지는 원쑤와의 싸움에서 비록 육체는 파괴되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만 계시면 더 밝은 미래가 온다는 신념을 지니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불굴의 투사였다.

참으로 박달동지를 비롯한 혁명의 1세들의 불굴의 투쟁정신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를 충성다해 받들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강령적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힘있게 고무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