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상으로 수더분하게 보이는 이 박달이야말로 속대가 바로선 사람이였고 허식이나 겉치레를 모르는 솔직하고 소탈하고 성실한 인간이였다.》
박달동지가 서대문형무소를 나선것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였다.
감옥문을 나섰으나 일제교형리들에 의해 투사의 육체는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일제교형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
살인귀들의 고문에 의해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지만 투사의 넋은 변하지도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철석같은 의지를 지닌 박달동지를 굴복시킬수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가 증거부족으로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박달동지는 불구의 몸으로 우리의 후대들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옥고를 치르며 7~8년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해방후 박달동지가 살아서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이전날에는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기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나이여서 본명(박문상)보다 박달로 불리운 투사는 하반신이 마비되고 뼈만 앙상한 불구의 몸으로 남의 등에 업혀
박달동지는
그후
의사들가운데는 구원할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한명도 없었다. 박달동지는 감옥문을 나설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저택옆에 박달동지의 집을 잡아주시고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시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가실 때마다 문병을 하군 하시였다.
박달동지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에서도
주체38(1949)년 어느날.
우산장휴양소에서 료양생활을 하고있던 박달동지는 주변농촌의 과수원들에서 사과에 봉투를 씌우지 않아 병충해를 입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는 당시 휴양소에 와있던
전후 경성에서 치료받고있던 박달동지는
박달동지는 쭉정이가 많은 벼이삭을 넣은 봉투와 함께 당의 농업정책이 정확히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에 대하여
박달동지는 자기가 영영 일어날수 없다는것과 또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닫게 된 때부터 침상에 누워서 청소년교양에 이바지할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박달동지는
박달동지는 한평생 자기의 손발이 되여주고 간호원이 되여준 충실한 안해와 의료일군들의 방조를 받으며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투사의 글줄들은 혁명전사들이
수많은 독자들이 투사의 앞으로 독후감과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박달동지는 자기의 글이 삶의 귀중한 길동무로 되고있다는 독자들의 편지에서 고무를 받으며 여러편의 글을 연방 써냈다.
어느날 박달동지는 자를 가지고 침대를 재여가며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수자를 적은 종이장을 안해에게 내보이며 거기에 적은 치수대로 책상을 하나 짜주면 그것을 침대우에 가로건너놓고 글을 쓰겠다는것이였다.
며칠후 그가 부탁한 책상을 목수가 정성껏 짜서 보낸 책상다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박달동지는 책상을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제 좀 쉬고 이 책상을 놓고 글을 쓰겠다고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박달동지는 그 책상우에서 한번도 글을 써보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1일 새벽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충성으로 높뛰던 투사의 심장이 박동을 멈춘것이였다.
박달동지의 동상은 우리 나라에서 혁명가들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동상이였다.
박달동지는 원쑤와의 싸움에서 비록 육체는 파괴되였지만
참으로 박달동지를 비롯한 혁명의 1세들의 불굴의 투쟁정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