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가 울릉도와 독도를 장악한것은 먼 옛날부터였다.
현재 전하고있는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아도 512년에 신라가 우산국으로 불리우는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을 귀속시켰다고 서술되여있다.
고려시기에도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은 경상도 울진현에 소속되였으며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에 대한 령유권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는 먼 옛적부터 우리 민족의 신성한 령토로 되여있었다.
일본이 울릉도 연안에 나들기 시작한것은 14세기경부터였다. 우리 나라에서 울릉도일대에 주의를 적게 돌릴 때 왜인들은 몰래 섬에 들어와 물고기를 잡아가군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일본사람들의 이러한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17세기말에 일본의 울릉도, 독도강탈책동을 반대하여 싸운 안룡복의 투쟁은 령유권수호를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한다.
《안룡복은 울릉도일대에 침입한 일본어선을 쫓아버린 다음 일본에 건너가 그 침략행위를 엄격히 단죄하였습니다. 안룡복은 이에만 그치지 않고 울릉도와 독도를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일본관리들로부터 받아가지고야 돌아왔다고 합니다.》 (
안룡복은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켜 싸운 애국적인물이였다.
* 일본측기록에는 안룡복의 이름을 안빙사, 나이 42살로 되여있다.
그는 당시 수군의 군역과 어로작업에서 고역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있었으나 높은 애국심과 담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동래에 살면서 왜놈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가 있었으므로 일본의 형편 특히는 쯔시마왜인들의 야심을 잘 알고있었으며 일본말도 잘하였다.
안룡복은 1693년에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켜 싸웠다.
《숙종실록》에는 《봄에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 배를 대고있었는데 왜인의 배가 공교롭게 와서 박어둔, 안룡복 2명을 유인해서 붙잡아갔다.》라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동래의 안룡복이 능로군에 소속되였는데 그는 일본말을 잘하였다. 그는 숙종19년 여름에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따다가 표류되여 울릉도에 이르렀는데 왜놈의 배를 만나 구금되여 일본의 오랑도(오끼섬)에 들어갔다.》라고 씌여있다.
이렇게 《숙종실록》에는 안룡복 등이 봄에 울릉도에 간것으로 되여있고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여름에 간것으로 되여있다. 한편 쯔시마 정관(正官) 다찌바나 마사시게가 가져온 쯔시마도주의 문서에는 봄에 안룡복 등이 울릉도에 간것으로 되여있다. 이것으로 보아 안룡복 등이 울릉도에 간것은 1693년 봄이였다고 인정된다.
그때 안룡복의 일행은 3척의 배에 42명으로 구성되여있었다.
안룡복일행이 울릉도에 도착한것은 3월 3일이였는데 왜인들을 만난것은 3월 18일이였다. 안룡복과 맞다들린 왜인들은 오다니가문소속 배군들이였다.
울릉도에 간 42명중에서 안룡복과 박어둔만이 3월 18일 왜선을 타고 울릉도를 떠나 3월 20일 오끼시마의 후꾸우라에 도착하였다.
오끼시마에 도착한 안룡복은 오끼도주에게 《울릉도는 우리 나라로부터 하루길이고 일본으로부터는 닷새길이다. 그래도 우리 나라에 속하지 않는단 말인가. 조선사람이 조선땅을 오가는데 왜 구속했는가.》라고 따지고들었다.
안룡복의 주장에 말문이 막힌 오끼시마도주는 안룡복일행을 곧 호끼번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여 안룡복과 박어둔은 왜인들과 함께 23일 후꾸우라를 떠나 시마사끼, 은주(이즈모, 시마네현) 나가하마를 거쳐 27일 요나고에 갔다.
요나고에 도착한 안룡복일행을 만난 호끼번주는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면서 은과 돈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룡복은 《일본은 더는 울릉도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그리고 은을 받는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굽어들지 않았다. 실지 그의 뜻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지키는데 있었다. 이어 호끼번주는 안룡복일행이 찾아오게 된 경위를 관백에게 보고하여 서계를 만들어주었다. 서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지경이 아니라는것이 밝혀져있었다.
5월 26일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인정시킨 안룡복, 박어둔이 귀항하게 되였는데 그때 막부에서 바다길은 위험하므로 안룡복일행을 륙로로 나가사끼까지 호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6월 1일 안룡복과 박어둔은 돗또리의 소재지에 가서 《회소》라는 숙소에서 한주일가량 머무르면서 4명의 중신들을 만나고 문건과 통행증을 받은 후 6월 7일 돗또리번(이나바)을 떠났다.
23일간의 먼 로정을 거쳐 6월 30일 나가사끼에 도착하였으며 7월 1일 나가사끼 봉행소에 들었다. 그때 나가사끼에 와있던 쯔시마왜인들은 안룡복에게서 막부의 승인하에 만들어준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고 한 확인문서를 빼앗았으며 9월 3일에 쯔시마로 압송하였다. 그때 쯔시마 도주는 안룡복 등을 《월경죄인》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쯔시마도주는 50일간이나 안룡복, 박어둔을 옥에 가두었다가 정관(正官) 다찌바나 마사시게를 시켜 동래로 압송하게 하였다. 동래에 온 왜인들은 그들을 또다시 왜관(경상도 칠곡군)에 40일간이나 구속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석방시켰다.
이렇게 안룡복 등은 왜인들의 책동으로 90일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래에 돌아온 안룡복은 동래부사에게 일본에 갔다온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그는 듣지도 않았다. 그 다음해(1694년)에 안룡복은 동래에 내려온 접위관(接慰官)(외국사신영접을 담당한 관료)에게 또다시 자기들이 일본에 갔다온 사연을 말하였으나 그 역시 믿지 않았다.
봉건통치배들은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왕조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돌아온 안룡복과 박어둔을 평가할 대신 《형장을 치면서 심문하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는것으로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안룡복은 2년간 류배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의 부당한 처사에 격분한 안룡복은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켜 싸운 자기들의 의로운 행동을 끝까지 인정시키려는 결심을 안고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1696년 또다시 울릉도와 독도에 갈것을 결심하였다.
이해에 안룡복은 어머니에게 문안드리기 위해 경상도 울산에 갔다가 장사를 하는 뢰헌을 만나게 되였다. 그는 뢰헌에게 몇해전에 울릉도에 갔다온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울릉도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안룡복이 울릉도에 가자고 한데는 자기들이 다녀온 후 울릉도와 독도의 안전을 다시금 확인하려는데 있었다.
* 《증보문헌비고》에는 《룡복은 매우 분격하여 울산의 바다가에 달려갔는데 마침 장사를 하는 중 뢰헌 등이 배를 대고있었다. 룡복은 그들을 달래여 말하기를 《울릉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내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길잡이를 하겠다.》고 하니 중은 기쁘게 생각하며 그를 따랐다.》고 서술되여있다.
울릉도에 가기로 결심한 안룡복은 5월경에 흥해사람 류일부, 녕해사람 류봉석, 평산포사람 리인성, 락안사람 김성길, 순천의 중 뢰헌, 승담, 련습, 령률, 단책, 연안사람 김순립 등과 함께 한척의 배로 울산을 떠나 3일만에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울릉도에 이르렀을 때 섬에는 왜인들의 배가 정박해있었고 왜인들도 보였다. 왜인들을 본 안룡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나라의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할수 있는가.》라고 소리쳤다. 안룡복의 노한 기상에 겁을 먹은 왜인들은 《우리들은 본래 송도에서 사는데 물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하려고 어찌다 나왔으니 이제 본고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룡복은 《송도(松島)는 자산도(子山島-독도)이고 그 역시 우리 나라의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서 산단 말인가.》라고 꾸짖었다.
이튿날 새벽 안룡복과 그 일행은 배를 타고 자산도(독도)로 갔다. 이들이 섬에 도착하니 왜인들이 가마를 쭉 걸어놓고 한창 물고기기름을 졸이고있는중이였다. 격분한 안룡복은 몽둥이로 가마를 들부셨다. 겁에 질린 왜인들은 주섬주섬 물건들을 거두어 배에 싣고는 도망쳤다.
안룡복일행은 배를 타고 왜적들을 추격하다가 갑자기 태풍을 만나 5월 20일 오끼시마에 이르게 되였다.
섬에 오른 우리 사람들을 본 오끼시마의 왜인들은 섬에 온 까닭부터 물었다. 안룡복은 《일전에 내가 여기에 와서 울릉도와 자산도(독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확정하였고 지어 관백의 문서까지 받아갔다. 그러나 당신네 나라에서 엄격히 통제하지 못한탓으로 아직까지도 왜인들이 우리 나라의 지경을 침범하고있으니 어찌된 일이요?》라고 따지고들었다. 그러자 왜인들은 이 사실을 호끼번에 통보하여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날을 기다렸으나 무소식이였다. 왜인들의 처사에 격분한 안룡복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6월 4일 호끼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안룡복은 《울릉, 자산량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울릉, 자산(독도) 두 섬의 조세징수를 맡은 장수》이라고 자칭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처한것은 이번 걸음을 통하여 다시금 두개 섬의 령유권을 공식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호끼번의 아까사끼여울에 도착한 우리 배의 앞머리에는 《조울량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조선울릉도(우산도) 두섬의 조세를 감독하는 관리 신 안동지의 일행], 《기선미견성도우귀고향사농사》(起船尾見盛稻又歸古鄕思農時-선미에 서서 무성한 논벼를 보니 우리 역시 고향에 돌아가 농사지을 때를 생각하다)라고 먹으로 쓴 기발이 위엄있게 드리워져있었다. 룡복은 먼저 사람을 시켜 우리 사람들의 도착소식을 호끼번주에게 알려주라고 하였다. 소식을 받은 호끼번주는 안룡복일행을 위해 사람과 말을 보내왔다.
안룡복은 푸른 천릭에 검은 베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탔으며 동행한 우리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고 호끼번주로 갔다. 뭍에 오른 일행은 전념사라는 절간에 안내되여 며칠간 류숙하다가 돗또리번(성)으로 들어갔다.
안룡복은 도주와 대청우에 마주앉았고 여러 사람들은 중간섬돌에 자리잡았다.
이렇게 되여 조선봉건왕조의 《울릉자산량도감세장》과 일본국 호끼번주와의 공식담판이 시작되였다.
먼저 호끼번주가 안룡복에게 《무슨 일로 오셨는가?》라고 묻자 안룡복은 《전번에 두 섬의 문제로 확인문서를 받아가지고 간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쯔시마도주가 문서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자주 심부름군을 보내여 법도 없이 함부로 침해하군 한다.내가 이제 관백에게 글을 올려 그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도주가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안룡복은 문관복차림을 한 리인성을 시켜 막부에 보낼 글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때 쯔시마도주의
호끼번주는 전날 조선지경을 침범하였던 왜인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게 한 후 안룡복에게 《두 섬(울릉도, 독도)이 일단 너의 나라(조선-인용자)에 소속된 후에 혹시 다시 비법적으로 넘어가는 자가 있다거나 쯔시마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한다면 어떤 경우든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보내면 응당 엄중히 처리할것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안룡복은 왜인들에게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과 다시는 이 지역에 침입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또다시 받아냈다.
1696년 8월 6일 호끼번도주는 안룡복일행에게 식량을 주고 왜인을 붙여주면서 호송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룡복은 시끄러운 일이 생길것 같아 왜인의 동행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렇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왜인들에게 확고히 인정시킨 안룡복일행은 바다를 무사히 건너 8월 29일 강원도 양양포구에 도착하였다.
양양에 도착한 안룡복은 일본에 갔다온 전후사연과 관백에게 보내려고 작성하였던 문서를 감사에게 올려보냈다. 그러나 강원도 감사 심평은 이들을 잡아가두는것으로 대답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이 안룡복의 의로운 행동을 불법으로 몰아댔으나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켜 희생도 두려움없이 용감히 투쟁한것으로 하여 쯔시마도주의 령토탈취흉계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였으며 쯔시마도주가 에도막부(도꾸가와막부)의 징벌이 두려워 더 이상 울릉도와 독도문제를 제기할수 없게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의 관료들도 안룡복의 의로운 투쟁을 긍정하였다.
룡복에게 형벌을 가하려는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돈녕부 령사 윤지완과 령부사 남구만은 그렇게 하면 쯔시마만 좋아할것이라는것, 또 왜인들이 롱간질을 하면서 우리 땅을 빼앗으려고 한 죄상이 밝혀진것은 안룡복의 공로라고 하였으며 지사 신여철도 《나라에서 할수 없는 일을 그가 해냈다.》고 평가한것은 그것을 증명하여준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의 편찬자들이 《왜가 오늘(20세기초)에 이르러 울릉도를 일본땅이라고 다시 말하지 못하는것은 모두 안룡복의 공이다.》라고 한것도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거둔 안룡복의 공에 대한 정당한 평가였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싸운 안룡복의 투쟁에 의하여 일본은 두개 섬의 조선령유권을 공식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일본의 우익보수세력들은 안룡복사건자료가 《신빙성이 없다.》느니 당시 일본이 령유권을 인정한것은 울릉도뿐이라느니 하면서 울릉도와 독도의 령유권을 지켜싸운 안룡복과 관련한 력사자료를 덮어보려고 획책하고있다.
그러나 17세기말 안룡복 등 우리 인민들이 두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당당히 지켜 싸운 력사자료를 절대로 지워버릴수도 말살할수도 없다. 울릉도와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조선의 섬으로 남아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