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나라 인삼재배업에서의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

 2020.12.2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적관계도 자기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발생발전하였습니다.》 (김정일전집》 제4권 433페지)

우리 나라의 인삼은 옛날부터 사람들을 무병장수하게 하는 보약으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인삼은 삼국시기부터 특효약재로 리용되였으며 특히 고려시기에는 다른 나라들에 수출되여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고려인삼》으로 불리웠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 인삼은 으뜸가는 보혈강장제로 리용되여왔다. 인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고려시기부터 인삼재배가 시작되였고 그후 인공재배법이 창안되였으며 17세기말에 이르러 포전재배로 발전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후반기 인삼재배업은 더욱 크게 보급되여 그것은 상업적인 인삼재배밭경영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후반기 상업적인삼재배밭경영이 가장 발전한 대표적인 지역은 개성지방이였다. 당시 개성지방은 풍토가 인삼재배에 매우 적합하였던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인삼재배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였다.

이시기 다른 나라들과의 적극적인 대외무역활동과 국내상업에서의 중심적인 역할로 막대한 상업자본을 축적한 개성상인들은 인삼의 재배와 판매를 통하여서도 막대한 리득을 보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압록강건너 책문*에는 우리 나라의 인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고려인삼국까지 생겨났다.

*책문은 당시 조선과 청나라 량국국경완충지대의 분계선에 목책(나무울타리)을 설치한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에 수출한 인삼의 총액은 1797-1798년에 120~160근이였던것이 1832년에는 8 000근, 1847년이후에는 대략 4만근이나 증가되였다.(1근=600g) 이시기 의주의 큰 상인이였던 림상옥에 대하여 《그가 한번 인삼을 가지고 베이징에 가서 실어온 은덩어리는 쌓으면 마이산만하고 비단을 쌓으면 남산만하였다.》라고 한 력사기록도 있다.

조선봉건왕조후반기에 들어와 우리 나라에서는 상품화페관계가 농촌에 보다 깊이 침투하게 되면서 인삼재배령역에서 상업적경영이 발전하게 되였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적경제관계도 발생발전하였다.

조선봉건왕조후반기 우리 나라 인삼재배업에서의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은 우선 이시기 인삼재배업에서 고용로동에 대한 착취가 널리 적용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당시 상인들은 삼포경영에 자본을 투자하는 경우 물주로 등장하여 생산물의 판매권을 독점하고 폭리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인삼재배는 기술공정이 복잡하였던것만큼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많은 로력이 필요하였다. 해빛과 온도, 물조절을 위한 일상적인 로력은 물론 특히 모를 떠서 삼포에 옮겨심을 때에는 한꺼번에 많은 로력이 요구되였다. 모를 캐거나 옮겨심는 일은 시간을 다투는 공정이였기때문에 이때 포주(삼포경영주)들은 고정적인 고용로력이외에 수시로 부근의 농민들을 고용하였으며 일이 몹시 바쁠 때에는 다른 지방에서 오는 계절로동자들까지 고용하였다. 고정적으로 또는 계절적으로 고용된 품팔이군들은 포주의 삼포에서 기업주의 생산도구를 리용하면서 지정된 일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날삯을 받았다. 여기서 포주와 삯군과의 관계는 그 어떤 부가장적관계나 경제외적강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착취관계라고 할수 있다. 즉 포주들의 토지와 생산도구를 가지고 각종 형태의 고용로동(1년고용, 계절고용, 1일고용 등)에 의거하여 상품으로 인삼을 생산한 개성의 삼포경영은 자본주의적착취관계에 기초한 경영방법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시기 인삼재배업에서의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은 또한 인삼재배분야에서 새로운 형태의 농업자본가의 출현으로 자본주의적착취관계가 형성된것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당시 삼포경영에서는 자본주의적차지농업가가 새롭게 출현하였다.

인삼재배업자는 무엇보다도 인삼재배에 가장 적합한 땅을 포전으로 선택하여야 하였는데 이 경우 그는 직접 땅을 사들이기도 하고 토지소유주로부터 일정한 기간 임대차*하기도 하였다.

* 임대차(賃貸借)는 일정한 삯을 정하고 빌려주거나 빌어쓰는것으로서 임대지는 곧 일정한 삯을 정하고 빌려주거나 빌어쓰는 땅이다. 차지농은 자본주의하에서 토지소유자로부터 빌린 토지를 가지고 임금로동자에 대한 착취에 기초하여 농업을 경영하는 농업자본가이다.

임대차기간은 인삼이 다 자라는 기간을 기준으로 하여 보통 6~7년으로 하고 토지임차료(토지를 빌어쓴데 대하여 치르는 삯)는 알곡재배지의 소작료보다 2~3배 또는 5~6배에 달하였다. 이러한 소작료의 높은 비률은 상업적농업발전의 특징적인 현상이였다는 사정과 함께 인삼재배에서 얻는 리득이 알곡재배에서 얻는 리득보다 수십배나 많았던 사정과 관련되였다. 당시 임차료는 일반적으로 화페로서 미리 지불되였으며 현물로 지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렇게 개성의 삼포주들은 토지소유자에게 지대를 지불한 대가로 토지를 자유롭게 리용하고 토지경영에서 고용로동자들을 채용하여 리득을 얻는 차지농업가였다.

개성의 대포주들은 처음에는 제각기 자기 인삼포를 경영하였으나 점차 근대적합자조직인 회사를 뭇고 자본을 합쳐 융자하면서 넓은 면적의 삼포를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공동으로 수삼을 사서 홍삼을 제조하기도 하고 판매하기도 하였다.

개성포주들은 1849년에 합자회사형식의 《개성삼업인회의소》를 창설하고 매 포주들이 소유하고있는 삼포면적에 따라 규정된 자금을 주식회사형식으로 합쳐서 공동으로 융자하여 경영하였다. 이 회의소의 후신인 《개성삼업조합》(1910년 2월 4일 조직)의 설치당시의 실태를 보면 조합의 목적은 조합원들(초기에 130명)의 공동리익을 도모하여 인삼경작의 개량과 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는것이며 조합원은 인삼지로 규정한 경작구역내의 경작자로서 경작지면적에 따라 규정된 자금을 조합기금으로 출자한 사람만이 될수 있었다. 그리고 조합원은 그 출자액에 따라 조합리익금의 분배몫을 가질수 있었다. 《개성삼업조합》은 초기부터 완전한 자본주의적경영방식으로 인삼을 생산한 주식회사였으며 이 조합의 원형인 《개성삼업인회의소》도 규모가 그보다 작았을뿐 삼포경영방법과 회의소운영방법은 거의 같았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개성삼업인회의소》는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국내외시장수요와 가격을 고려하면서 인삼의 생산과 가공 및 판매를 계획하고 가공제품의 종류를 조절하는 등의 활동을 벌리면서 백삼가공업까지 독점하고 회의소의 리윤을 높여나갔다고 전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에 포삼용 홍삼만도 1만 5천근을 생산하여 탁지부(재정경제담당관청)에 매 근당 50량의 세를 납부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탁지부가 포삼액으로 정해준 홍삼은 3만근에 이르렀고 1901년에는 7만근으로 뛰여올랐다.

봉건정부의 포삼수탈정책이 강화되면서 홍삼제조액은 증대되였으나 빼앗기는 량도 많아지는것으로 하여 개성삼업자들은 홍삼을 제조하여 바다길로 중국의 연경 즉 베이징지역으로 몰래 수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시기 인삼재배업에서의 자본주의적관계가 시련을 겪으면서도 상당한 높이에서 발전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우리 나라 인삼재배업은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발전수준에 있었으며 특히 개성홍삼은 그 수량과 품질에 있어서 세계인삼시장을 독점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이처럼 조선봉건왕조후반기 자본주의적방법에 의한 인삼재배업의 발전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가 광업부문뿐아니라 농업부문에도 일정하게 침투되여가고있었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