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염주군 주의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나무후치에 대하여

 2025.10.7.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국각지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유적유물들은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찬란한 문화와 력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이다.

1992년 12월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 발굴된 나무후치도 청동기시대 우리 나라의 농경문화와 그 발전력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중의 하나이다.

주의리는 염주군 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14㎞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과정에 나무후치와 참나무로 만든 가공품 1개, 돌망 2개가 두께 6m정도인 니탄층속에서 발견되였다.

여기서 제일 주목되는 유물이 나무후치이다. 나무후치는 주요 농기구의 하나인것만큼 그 형태와 특징, 년대를 비롯한 연구는 우리 나라의 농업발전력사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염주군 주의리에서 나온 나무후치
사진. 염주군 주의리에서 나온 나무후치

나무후치는 《L》모양의 굳은 참나무를 다듬어 만든것인데 날, 아래대, 아래대의 뒤끝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여 올라간 웃대로 이루어졌다.

날은 굵은 아래대의 앞끝웃면을 사선으로 경사지게 깎아 보습날과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후치질을 할 때 흙이 자연히 왼쪽으로 제껴지도록 왼쪽이 오른쪽보다 얇게 만들었다. 날의 길이는 31㎝정도이고 너비는 18㎝ 정도이다.

아래대는 원래 날너비와 같았던 굵은 통나무를 가늘게 깎아 만들었으며 아래대와 날사이에는 술(흙을 한쪽으로 밀어제껴 뒤집도록 하는 장치)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 3개가 있다. 아래대의 길이는 35㎝정도이고 너비는 7.5㎝정도이다.

웃대는 웃쪽으로 올라가면서 점차 가늘어졌는데 끝쪽에는 후치의 방향조절을 위한 손잡이를 맞추었던 구멍이 나있다. 길이는 73㎝정도이다.

이미 1958년 4월에 이곳에서는 이와 류사한 나무후치가 발굴되였다.

그때 나온 나무후치도 《L》형의 참나무를 다듬어 연장의 몸체를 이루게 하였고 땅에 닿는 앞부분의 끝은 납작하고 뾰족한 날을 이루었으며 대웃부분에는 손잡이를 꽂을수 있는 구멍이 뚫어져있었다. 크기는 날을 포함한 아래대의 길이가 80㎝정도이고 웃대의 길이는 100㎝정도였다. 1992년에 발굴된 나무후치는 1958년에 알려진 나무후치보다 약간 작은 감은 있지만 구조와 생김새가 거의 같으므로 두 후치는 같은 시기에 사용된 농기구들로 인정된다.

나무후치의 년대는 우리 나라 서해안에서 니탄층의 형성시기와 발굴된 여러 유물들의 년대들을 비교분석한데 기초하여 B.C.4000년기말경으로 볼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농사를 지어왔고 신석기시대 중기인 B.C. 6000년기후반기부터는 보습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봉산군 지탑리유적과 마산리유적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여러 신석기시대유적들에서 돌보습을 비롯한 여러가지 농기구들이 발견된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주의리에서 발견된 나무후치는 신석기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에 우리 나라의 농업이 매우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나무후치가 신석기시대의 돌보습에 비하여 발전된 농기구라는데 있다. 나무후치는 돌보습보다 훨씬 가벼우므로 다루기가 쉽다. 또한 굳은 참나무로 만들었으므로 깨질수 있는 돌보습보다 오래 사용할수 있다. 특히 나무후치는 여러가지 구조물들과 결합하여 편리하게 사용할수 있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있다. 이것은 이 시기에 나무후치와 같은 농기구들이 매우 발전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 농사가 널리 진행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더우기 나무후치와 함께 발굴된 돌망들은 농사뿐 아니라 낟알가공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는것을 확증해준다.

이처럼 주의리에서 발굴된 나무후치는 우리 선조들이 신석기시대의 농경문화에 토대하여 청동기시대에 나무후치와 같은 복합적인 농기구를 리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당시 우리 나라의 농업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는것을 확증하여주는 귀중한 실물자료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