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중세농민들의 투쟁에 대한 과학적해명

 2024.9.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봉건사회의 력사는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피어린 투쟁의 력사라고 볼수 있습니다.》

지난날 봉건사회에서 농민을 비롯한 피압박인민들은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기아와 빈궁속에서 헤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따라서 피압박인민들은 자기들에게 신분적멸시와 빈궁을 강요한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여 완강히 싸워왔다.

그 누구보다도 력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지니시고 모든것을 주체적립장에서 완벽하게 밝혀주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52(1963)년 7월 18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하신 담화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우리 나라 중세농민들의 투쟁을 옳게 리해하는데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서 중세농민들의 투쟁에 대한 문제에 과학적인 해명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무엇보다먼저 우리 나라 중세농민들의 투쟁이 유럽나라들과는 달리 자주 전국을 휩쓸군 한 원인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유럽봉건사회는 령주제가 지배하는 분권적인 봉건사회였지만 우리 나라의 력대 봉건국가들은 시대에 따라 강약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중앙집권적봉건국가들이였다고, 우리 나라 봉건국가들은 봉건지주계급의 리익의 대변자,옹호자인 동시에 그 자체가 최대의 억압자,착취자였다고, 봉건국가는 전국에 뻗쳐있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계를 통하여 농민과 수공업자들을 억누르고 그들에게 무거운 국가적의무를 들씌웠다고 하시면서 봉건국가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국가권력에 등을 대고 인민들의 피땀을 짜내던 개별적인 봉건지주들의 횡포한 억압과 수탈의 마수는 나라의 어느곳이라 할것없이 강하게 미치였으며 그것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기세도 온 나라 각지에서 다같이 끓어번지군 하였다고, 그리하여 사회에 봉건적인 자연경제가 지배하고있었고 전국적범위에서 투쟁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한곳에서 투쟁의 불꽃이 튀면 그것은 삽시에 온 나라에 료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다고 그 원인에 대하여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음으로 중세 농민폭동과 농민전쟁을 어떻게 구별하겠는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답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전쟁은 어떤 국가나 계급이 자기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벌리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라고,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농민전쟁은 농민폭동보다 더 조직화된 폭력투쟁으로 볼수 있다고, 다시말하여 중세기의 농민전쟁은 군대와 비슷한 편제와 무장을 갖춘 농민봉기군이 봉건정부군과 벌린 투쟁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농민폭동, 농민전쟁에 대한 리해를 잘하려면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병제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하시며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중세 우리 나라 군인의 기본층은 량인들이였으며 량인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사복무의 의무를 졌으며 활과 창 같은 무기를 자체로 갖추고있다가 교대로 군대에 나가군 하였다고, 량인들은 집에서 농사를 지을 때에는 농민이였지만 일단 무기를 잡고 나서면 군인이였다고, 그런것만큼 농민들이 준비해두었던 활이나 창을 잡고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투쟁에 궐기하면 무장장비에서 봉건정부군과 크게 다를것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그들사이의 싸움이 적지 않게 군대와 군대사이의 싸움처럼 진행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라고, 12세기 후반기에도 많은 농민군부대들이 군대와 비슷한 편제와 무장장비를 갖추고 대규모적인 싸움을 벌렸는데 이런 견지에서 보면 12세기 후반기에 벌어진 농민들의 투쟁을 농민전쟁이라고 불러도 큰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음으로 고려후반기에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이나 농민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원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려후반기에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는 전반기보다 더욱 강화되였으나 12세기에 볼수 있었던것과 같은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나지 않은것은 고려후반기에 치렬하게 벌어진 반침략투쟁과 관련되여있다고 하시면서 고려후반기는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전면에 나섰던 시기이다, 13세기~14세기에 고려인민들은 남북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외적의 침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외래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외적의 발굽에 짓밟히게 되면 인민들은 계급적인 억압에 민족적인 압박과 멸시까지 받게 되는데 외적의 침략을 받는 경우 주되는 힘을 반침략투쟁에 집중하는것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우리는 외래침략군이 침공해왔을 때 각지의 농민폭동군들이 자진하여 봉건정부가 조직한 방어군에 참가하여 외적을 맞받아 용감히 싸운 사실을 잘 알고있는데 고려후반기에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가 더욱 강화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농민전쟁, 농민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주되는 원인을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전면에 나섰던 사정과 결부시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음으로 중세농민전쟁,농민폭동의 실패원인과 력사적의의에 대해서도 주체의 사회력사관에 기초하여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선 중세농민전쟁, 농민폭동의 실패원인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중세농민들은 자기들이 당하고있는 고통과 불행의 화근이 봉건제도자체에 있다는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있은데로부터 자기들을 못살게 굴던 개별적인 관리나 지주를 때려엎는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왕의 기만선전에 넘어가 손에서 무기를 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중세농민들은 《인자한》 임금이나 《어진》 관리가 나오면 자기들의 처지가 개선되리라는 환상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봉건통치배들과 통치기관을 짓부시고 넓은 지역을 장악하여도 거기에 자기들이 잘살수 있는 나라를 세울수 없었으며 새로운 봉건군주가 등장하는것을 막아낼수 없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중세농민들은 조직적으로 단합하여 싸우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투쟁이 전국적성격을 띠고 벌어지는 경우에도 각지 농민군부대들은 많은 경우 조직적인 련계없이 고립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이러한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피흘려 싸웠지만 실패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중세농민전쟁,농민폭동의 력사적의의에 대해서도 명백한 해명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중세농민전쟁,농민폭동은 승리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인민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고, 투쟁에 궐기한 인민들은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고 자기의 지위를 한걸음한걸음 높이면서 사회를 끊임없이 전진시켜나갔다고, 중세기 피어린 투쟁속에서 인민들의 힘이 날로 자라났으며 그에 토대하여 피압박인민들의 투쟁자체가 끊임없이 발전하였다고 그 력사적의의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의 투쟁에 대한 과학적이며 독창적인 해명은 커다란 리론실천적의의를 가진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의 투쟁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주심으로써 우선 중세농민들의 반봉건투쟁형태를 옳게 규정할수 있는 확고한 지침이 마련되게 되였다.

또한 우리 나라 중세농민들의 투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력사적조건과 구체적실정에 맞게 과학적으로 해명할수 있는 주체적인 연구방법론이 마련되게 되였다.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중세농민들의 반봉건투쟁을 옳게 파악하는데서 제기되는 근본문제들에 과학적인 해명을 주심으로써 민족사연구에서 기본내용의 하나를 이루고있는 우리 인민의 반봉건투쟁사서술을 새로운 과학적토대우에 확고히 올려세울수 있는 보다 넓은 길이 열리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