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에 목화를 퍼친 애국자 문익점

 2020.6.17.

목화는 사람들의 입는 문제해결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있을뿐아니라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효과적으로 리용되는 섬유작물의 하나이다.

조선에는 원래 목화가 없었다.

조선에서 목화는 14세기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퍼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문익점은 사회주의적애국주의교양은 받지 못하였지만 다른 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가지고와서 온 나라에 퍼침으로써 우리 인민이 대대손손 그 덕을 입게 하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2권 303페지)

문익점(1329-1398)은 고려말기의 학자이다.

문익점은 경상도 진주에서 태여났다.

문익점은 8살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20살때에는 당시 명성이 높았던 학자 리곡에게서 그의 아들 리색과 함께 열심히 배워 그 이름이 났었다. 그리하여 23살되는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량반의 후손이 아니므로 높은 관직에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연구에 정력을 다하였으므로 더욱 명성이 자자하게 되였다.

문익점은 32살에 가서야 별치 않은 벼슬을 받았다. 그는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학문을 닦아 자기를 완성하기에 힘을 기울인 결과 이듬해부터 성균관 순유박사로 있게 되였으며 벼슬길에 나선지 3년만에는 학문과 재능이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져 좌정언(정6품)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는 이때 정력적인 활동으로 당시 국왕이였던 경효왕을 도와 우리 나라를 먹으려고 잔꾀를 부리던 원나라세력을 구축하고 나라의 안전을 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원나라사신으로도 그가 추천되였던것이다.

문익점은 왕으로부터 국서를 받아가지고 일행과 함께 원나라로 갔다. 그런데 교활한 원나라지배층은 사신들을 억류하였고 문익점에게는 례부시랑이라는 관직을 줄터이니 자기들과 손을 잡자고 회유하면서 매수하려 들었다. 그를 고려침략의 안내자로 리용하려고 계획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술책과 협박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수 없었다. 원나라 황제는 문익점의 강직한 성품과 도도한 기상에 감히 어쩌지 못하고 기후가 나쁘고 맹수가 욱실거리는 운남지방으로 류배를 보내고 말았다.

문익점은 산설고 물설은 이역땅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류배살이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조건에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모든 정력을 독서에 바쳤으며 이곳 인민들과 친숙해지고 풍토를 연구하여 《운남풍토기》를 저술하였다.

이 시기 고려인민들은 조국강토로부터 원나라 침략자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리하여 원나라는 고려를 감히 포악하게 대하지 못하였으며 문익점일행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1363년 그들은 드디여 류형지를 떠나게 되였다. 문익점은 원나라땅 어디에서나 목화꽃을 보면서 고향과 삼베옷을 입고 그 추운 한겨울을 나는 인민을 생각하였다.

하지만 목화씨를 가져간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씨를 다른 나라에 가져가는것을 엄금하였고 만일 몰래 가져가다가 들키는 날이면 엄벌을 받게 되여있었다.

이때 류배지에 가거나 풀려나가는 죄인들에게는 다만 한두권의 책과 붓이 허락되였다. 그리하여 좋은 목화씨를 골라 붓대속에 정히 넣어 국경을 넘어섰다.

진정 4년만에 돌아오는 그리운 땅이였다.

문익점은 지체없이 진주땅에 도착하여 장인 정천익과 함께 건조한 곳, 젖은 곳 혹은 모래밭, 진흙땅 등을 구별하여 목화씨를 정히 심었다.

처음이니 재배리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렇게도 고심했건만 자기가 심은 다섯알중에서 겨우 두포기의 목화가 자랐는데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대신 장인이 심은 밭에서 네포기가 자라나 그중 한포기에 열매가 달려 구름같이 하얀 목화송이가 피여났다. 거기에서 근 100여개의 씨를 받게 되였고 3년이 지난후 문익점은 고향사람들에게 목화씨를 나누어주어 심게 하였는데 10년이 채 못되여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다.

그후 문익점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천을 짜서 인민들에게 입히려고 생각하고 여기에 아들과 손자까지 벼슬을 하려던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목화에서 솜을 내고 실을 뽑아 천을 짜는 공정을 탐구하도록 하여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씨를 뽑는 기계를 씨아라고 달고 실을 뽑는 기계를 손자의 이름을 붙여 문래라고 하였으며 천짜는 기계를 만들어 그것으로 짠 천을 역시 손자의 이름을 붙여 문명이라고 하였다.

후에 조선에서 문래는 물레로, 문명은 무명으로 불리우면서 전국에 퍼져 인민들을 삼베대신 목화로 짠 무명옷을 입게 되였으며 겨울옷해결에서 큰 도움을 받게 되였다.

1398년 6월 문익점은 누구든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을 굳게 간직하고 자그마한것이라도 남겨놓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8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문익점은 조선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오고 그 재배법과 천짜는 법을 보급시킨 애국자의 한사람으로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문익점의 나라와 인민에 대한 애국적인 소행으로 하여 무명옷을 입게 된 백성들은 그를 높이 찬양하여 그 붓대를 《만만금의 붓대》라고 일렀다.

열대지방에서만 자란다는 목화가 이렇게 조선땅에서 활짝 피여나 우리 인민들이 무명옷을 입게 된것은 오직 문익점의 애국심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은것이다. 그 따뜻한 무명을 보며 사람들은 문익점을 생각하며 신기한 그 붓대의 비밀을 그려보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