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민족의 자랑-평양의 부벽루

 2020.8.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방으로 앞이 탁 트인 을밀대의 봄경치나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를무렵에 펼쳐지는 부벽루의 풍경은 참으로 볼만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을밀대의 봄맞이나 부벽루의 달맞이는 평양 8경의 하나로 일러오고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4권 333페지)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단일민족으로 한강토에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오면서 자기들의 뛰여난 재능과 근면한 노력이 깃들어있는 우수한 민족유산들을 수많이 남겨놓았다.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민족사의 발상지이며 민족문화의 중심지인 수도 평양에도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우수한 문화적재부들이 수없이 전해지고있다.

조선민족의 더없는 긍지이며 자랑인 평양의 수많은 문화적재부들가운데는 모란봉의 대동강기슭 을밀대아래에 세워진 부벽루도 있다.

부벽루는 고구려시기인 393년에 영명사라는 절간의 중인 흥화상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세우고 이름을 《영명루》라고 부르다가 12세기초에 그것을 다시 고쳐 지으면서 《대동강의 푸른 물에 둥실 떠있는 루정》이라는 의미를 담아 《부벽루》로 불렀는데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 파괴된것을 1614년에 다시 세워 그것이 해방후까지 전해지게 되였다. 그후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의 폭격으로 또다시 파괴된것을 주체45(1956)년과 주체48(1959)년 두차례에 걸쳐 다시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되였다.

부벽루는 정면 5간(14.58m), 측면 3간(7.68m)으로 되여있으며 낮은 밑단우에 세운 기둥의 간격은 측면 가운데간을 제일 넓게 하고 그 량옆과 좌우끝의 차례로 간격을 좁혔다. 두공*1은 2익공바깥도리식이고 꽃가지형인 제공은 굵은 선으로 새겨 섬세한 부분까지 나타낸것으로 하여 생동한 느낌을 주고있다. 지붕은 합각지붕으로서 2익공식두공*2을 얹은 날씬한 흘림기둥*3에 떠받들려있다. 또한 모서리부분에 바깥도리장여를 받친 첨차*4와 제공*5의 교차점아래에 짧고 네모난 동자기둥모양의 장식을 하였는데 그 수법이 아주 특이하며 장식적효과도 크다. 바닥은 납작한 판돌을 깔았으며 통천정으로 된 건물안은 힘받이부재들인 보, 도리, 서까래 등을 드러나게 하면서도 균형있게 배치하였다.

*1 두공-지붕처마를 돋우게 하고 떠받들며 장식하기 위하여 기둥우와 도리사이에 설치하는 기둥받침구조. 주두, 첨차, 산미, 소로 등으로 이루어진다.

*2 익공식두공-기둥이마보만을 가지면서 또 기둥우에만 설치하는 두공.

*3 흘림기둥-기둥의 일정한 높이에서부터 우로 올라가면서 점차 가늘어진 기둥.

*4 첨차-벽의 축에 일치되게 하거나 그에 평행되게 짜올린 길다란 부재.

*5 제공-첨차와 직각이 되게 짜올린 부재.

부벽루는 모양이 모란꽃과도 같이 기묘하고 특이한 모란봉과 그것을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대동강과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있다.

예로부터 부벽루는 아래로는 푸른 물이 출렁이고 앞으로는 넓은 벌이 눈뿌리 아득히 펼쳐진 자연경치가 뛰여나게 아름다운것으로 하여 고려시기 이름난 명시인의 한사람으로 일러오던 김황원(1045-1117)도 처음 이곳에 와보고는 그 절경에 감탄을 금치 못해하며 《긴 산성 한면엔 넘실넘실 강물이요. 넓은 들 동쪽엔 띠염띠염 산들일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 구절에서 부벽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할만 한 적중한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시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채 온종일 란간에 기대앉아 자기의 무능함만을 한탄하다 부벽루를 떠났다고 한다. 그때 김황원이 끝을 맺지 못한 시의 한 구절이 지금도 련광정의 기둥에 그대로 걸려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천하절승 평양과 부벽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하려고 한 시인의 애국적열정과 부벽루의 경치가 지난날 이름난 명시인들도 무색케할 정도로 뛰여났다는 하나의 일화를 전해주고있다.

지난 시기 시에 능하다고 하는 적지 않은 문인들은 모두 부벽루에 올라 절묘한 시구들을 고르고 다듬어서 제나름의 명시들을 남겼는데 그가운데는 김극기(12세기말-13세기초), 리색(1328-1392), 리숭인(1349-1392), 성현(1439-1504) 등을 비롯한 고려시기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이름난 문인들이 남긴 시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시에서 《한발 쳐든 해오라기 안개속에 뚜렷하고/란간에 기댄 사람 그림속의 미인같네》,《바위는 멀리 돌아 그 끝을 알수 없고/풍경은 마음 끌어 안정할 길 없구나》 등과 같이 자연의 조화를 이룬 부벽루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동하고 진실하게 형상하였다.

부벽루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는 일찌기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17세기에 우리 나라에 왔던 허국이라는 명나라사람은 부벽루에 올라가 평양의 풍치를 구경하고는 그것을 중국에서 명승이라고 하는 소주, 항주에 비기면서 《소주, 항주는 번화하고 사치한것이 세상에 비길데 없으나 그것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든것이다. 부벽루의 맑은 물과 절벽, 섬과 산봉우리들은 모두 자연이 이루어놓은것이니 부벽루는 소주나 항주보다 더 월등하다.》라고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터놓았다고 한다.

부벽루의 아름다운 절경에서 절정을 이루는것은 우리 인민들이 정월대보름을 비롯한 민속명절들에 부벽루에 올라 달맞이를 하는 풍경이였다. 그리하여 《부벽완월》 즉 《부벽루에서의 달맞이》는 《을밀상춘》(모란봉 을밀대의 아름다운 봄경치), 《영명심승》(해질무렵 영명사에 중들이 찾아드는 풍경), 《련당청우》[애련당(대동문에서 종로로 통하는 길 중간에 있었던 련못)에 내리는 비소리], 《보통송객》(보통강나루터에서 떠나는 나그네를 바래는 풍경), 《룡산만취》(대성산의 사철푸른 나무가 늦은 가을에도 푸르러있는 풍경), 《거문범주》[수례문(옛날 평천리앞을 가로막았던 외각의 성문)에서의 배놀이], 《마탄춘창》(이른 봄 대동강의 여울 마탄의 눈석임물이 넘쳐서 소용돌이치는 풍경)과 함께 평양8경의 하나로 전해지게 되였다. 평양8경의 하나인 《부벽루에서의 달맞이》에 대하여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재능있는 학자였던 성현(1439-1504)은

《꿩이 날개 펼쳤는가 붉은 추녀 들렸는데

하늘 맑아 그 그림자 거꾸로 비치누나

달속의 항아*1선녀 옥도끼 추려보내

열두굽이 굽은 란간 옥돌이 되였구나


눈인양 계수꽃은 어지러이 흩날리며

맑은 빛 휘뿌리여 살결을 비쳐주네

퉁소소리 끊어지자 구름도 사라지니

황류*2를 가득 부어 두 귀를 덥히노라》*3

라고 노래하였다.

*1 항아-신화에 나오는 달속의 녀신.

*2 황류-검은 기장쌀로 담근 술. 제사때 땅에 붓는데 썼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 51권 평양 팔영)

시에서 성현은 둥글고 환한 보름달이 비쳐들어 출렁이는 대동강물결우에 비낀 부벽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모양에 비유하였으며 부벽루의 합각지붕을 떠받들고있는 기둥이 달빛에 반사되여 반짝이는 모양을 흰빛을 뿌리는 옥돌에 비유함으로써 부벽루에서의 달맞이풍경을 예술적으로 잘 형상하고있다.

부벽루에서의 달맞이가 제일 성대하게 진행된것은 한해중에 제일 크고 환한 보름달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날의 달맞이가 특별히 이채를 띠였는데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떠오르는 둥근달을 먼저 보는 사람에게 그해에 행운이 차례진다고 여기면서 저저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보름달을 구경하려고 하였다. 특히 평양지방에서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란봉의 부벽루에 올라 달맞이를 하는 정경이 하나의 이채로운 풍경을 이루었는데 그 풍습이 세세년년 이어져 《부벽루에서의 달맞이》가 평양8경의 하나로까지 되게 되였다.

지난날 우리 인민들은 달맞이를 하면서도 착취와 억압이 없는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싶어하는 자기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소원을 솟아오르는 둥근달에 담아보군 하였다. 그러나 보름달은 해마다 솟았고 부벽루에서의 달맞이도 어김없이 진행되였지만 언제 한번 우리 인민들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된적은 없었으며 부벽루의 아름다운 자연경치조차도 오랜 세월 돈있고 권세있는 자들의 유흥터로밖에는 되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그 세월에도 부벽루에서 바라보는 둥근달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망국의 설음과 괴로움만을 더해주었다.

이렇듯 력사의 풍파속에 그 빛을 잃었던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인 부벽루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고 이 땅우에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세워주신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을수 있게 되였으며 지난날 봉건지배계급의 독점물로 되여오던 우수한 문화적재부들이 인민들의 값높은 향유물로 빛을 뿌릴수 있게 되였다.

부벽루는 그의 아름다운 경치에서뿐아니라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 평양성을 지켜 싸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운 투쟁이야기도 깃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

오늘도 조선민족의 자랑, 평양의 자랑인 부벽루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위대한 사랑의 손길에 떠받들려 로동당시대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민들 누구나 다 즐겨찾는 문화휴식터로 훌륭히 꾸려져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민족애와 위대한 인민사랑을 길이길이 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