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고구려의 력사는 조선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만천하에 시위한 력사로, 중세시기 동방력사를 주도해온 력사로 빛나고있다.
고구려가 오늘과 같이 세계력사무대에서 조선민족의 존엄을 만방에 떨친 강대국으로 빛을 내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전에 우리 나라 삼국시기의 력사에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된것으로 되여있었는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7세기중엽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자들은 신라를 첫《통일국가》로 내세우고 민족사를 신라중심으로 체계화해놓았다.
원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어제오늘에 생겨난 주장이 아니였다. 그것은 일찌기 7세기 중말엽경에 저들의 사대매국적죄악을 가리워보려는 신라통치배들의 머리속에서 움터났고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의해 체계화되였다. 그 주장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더 굳어져 움직일수 없는 하나의 《정설》로 공인되게 되였다.
하기에 력사연구에 한생을 바쳐온 로학자들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대해서도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668년에 고구려는 당나라침략자들과 신라통치배들의 결탁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유민들은 조국강토에 기여든 침략자들을 이르는 곳마다에서 공격하고 고구려의 강토에서 내쫓기 위한 줄기찬 투쟁을 벌리는것과 함께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고구려유민들의 반침략투쟁에 의하여 료동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고구려의 전령토에서 당나라침략자들은 완전히 쫓겨났으며 마침내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만인 698년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창건되여 조선민족의 령역안에는 두개의 국가 즉 발해와 신라가 병존하게 되였다.
이러한 력사적사실은 당시에 통일국가가 수립되지 못하였으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설은 외곡날조된 설이라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는것이였다.
삼국통일에 대한 신라의 립장과 그의 국력을 놓고서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란 어불성설이였다.
신라에게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외세에 빌붙어 그의 힘을 빌어 동족의 국가들을 해치고 령토를 넓힐 야망밖에 없었다.
신라통치배들은 령토확장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나라침략세력을 끌어들이는 죄악적책동을 감행하였다. 648년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 통치배들을 찾아가 두 나라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의 광대한 고구려땅은 당나라에 떼넘긴다는 용납못할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에게 처음부터 삼국의 전령토와 주민을 하나의 주권밑에 통합하지 않고 고구려령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침략자들에게 떼넘기고 저들은 대동강이남의 고구려땅을 차지한데서 표현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삼국시기에 통일성업은 반통일세력을 힘으로 제압하고 전체 조선민족과 령토를 하나의 주권밑에 통합해야 하는 사업인것만큼 설사 통일을 지향한다고 하여도 그 힘이 없으면 실현할수 없는것이였다.
신라는 통일의지가 없었을뿐아니라 통일을 실현할수 있는 능력은 고사하고 자기의 존재조차 보존할수 없어 외세에 사대의존하여 간신히 존재하고있던 상태의 국가였다.
그러므로 지난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란 도대체 있을수도 생각조차도 할수 없는것이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나라가운데서 가장 국력이 약하여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아가며 존재하던 신라가 당시 동방의 대강국인 고구려와 그리고 자체의 국력을 강화해보려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강구하고있던 백제를 통일할것을 념원하면서 그것을 실현하였다고 하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야말로 천만번 부당한 론의가 아닐수 없다.
당시에 신라는 고구려에 비하여서는 더 말할것도 없고 백제에 비하여서도 론할 여지조차 없이 쇠약하였다.
국력에서 기본은 군력이다. 군력은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힘의 반영이다. 때문에 강력한 군력이 안받침되지 않고서는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할수 없다.
삼국시기에 고구려는 평시에 30만의 상비무력을 가지고있었으며 전시에는 100만의 무력을 동원할수 있었다. 그런데다가 고구려사람들은 상무기풍으로 단련되여있었으며 발전된 무장을 갖추고있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신라의 경우를 보면 660년 백제와의 전쟁때에 겨우 5만의 군사가 있었을뿐이였으며 668년 고구려와의 전쟁때 총동원한 수가 20만이였다고 전하고있다. 20만이라는 수자는 과장된것이겠지만 설사 20만정도였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상비군보다는 훨씬 적은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백제에서는 지방군이 6만정도였는데 중앙군까지 합쳐 계산하여 상비무력을 10만으로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신라의 5만의 군사에 비하여 볼 때 두배나 되는것이였다.이러한 자료를 놓고 따져보면 신라의 군력은 고구려에는 대비조차할수 없고 백제에 비하여 볼 때에도 쇠약한것이였다. 군력이 보잘것없는 신라에 의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통합된다는것은 도대체 있을수 없는것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사대에 명줄을 걸고있던 사대주의자들은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침략하고 이 나라들을 무너뜨린 행위를 삼국을 통일한것이라고 사실을 외곡날조하였으며 그것을 력사책들에 장황히 서술하기까지 하였다.
외세를 끌어들여 그의 힘으로 자기 민족의 국가들을 무너뜨린것은 통일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자주권을 외세에 맡기여 식민지로 만드는 반민족적행위이다. 그것은 외세가 자기의 힘으로 무너뜨린 다른 나라의 강토나 주민을 자기의 손아귀에서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고 자기의 부속물로,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것은 력사에 의하여 확증된 진리이기때문이다.
고구려는 존재 전기간 대강국을 건설하는것을 기본국책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고구려가 대강국건설의 기본국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내세운 가장 중요한 정책은 바로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이였다.
대강국을 세우자면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조선민족을 하나의 주권밑에 묶어세워야 하였다. 동족의 나라들을 통일할 때만이 조선민족의 자주권을 더욱 지켜나갈수 있고 조선민족성원전체의 힘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울수 있었다.
당시 외세가 우리 강토를 침략하고있는 조건에서 겨례의 국가들에 대한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 고구려국가는 외래침략세력을 우리의 옛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북방진출을 강력하게 밀고나갔으며 마침내 4세기 70년대까지 외래침략세력을 구축하고 이 지역정세를 안정시켜놓았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고있는 속에서도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사업은 중단함이 없이 밀고나갔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통합하기 위하여 남방진출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4세기 70년대까지 북방진출을 기본적으로 완성한 고구려는 주되는 력량을 남방에 돌리여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길에 들어섰으며 이때부터 신라와 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적공세를 취하였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위하여 468년 봄에 신라의 북쪽변경의 실직성을 공격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에 대한 군사적공격을 단행한것은 무려 13차, 백제에 대한 군사적공격을 진행한것은 369년 가을 9월에 치양에 와서 진을 친 때로부터 14차에 달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령토를 고구려의 령토에 소속시키면서 남쪽으로 계속 밀고나갔다.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들인 백제와 신라를 통합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가기 위하여 국가의 기본거점인 수도를 북쪽의 국내성으로부터 남쪽의 평양성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구려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302년에 전쟁포로 8 000명을 평양으로 보내여 평양건설을 추진시켰으며 334년에는 평양성을 고쳐쌓는 사업을 진행하고 그 이후에도 평양을 수도의 면모를 갖추도록 꾸리는 사업을 중단없이 진행하여왔다. 평양건설을 완성한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삼국통합사업을 더욱 힘있게 밀고나갔다.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하여 삼국통일성업은 5세기말엽 ~ 6세기초엽에 거의 완성단계에 올라서게 되였다.
이 시기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쪽은 내몽골동부 대흥안령산줄기가까이까지, 북쪽은 흑룡강남쪽류역가까이까지, 동북쪽은 흑룡강하류류역일대까지 미치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백제, 신라, 가야를 다 합친것보다 거의 10배나 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한 대국으로, 당시 우리 나라 전체 령역의 약 10분의 9를 차지한 나라로 등장하였다.
삼국을 통일하는것을 국가의 정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한것은 삼국시기에 오직 고구려뿐이였다.
실로 고구려의 력사를 바로잡아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기울여오신